brunch

돼지고기 수육

텍사스에서 수육을 삶는다는 건

by 앤지

얼마 전 인터넷에서 짤막한 글을 하나 읽었다.

불의 발견이 위대한 이유는...(중략)...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단 시간에 뇌에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공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10분이면 한 끼 하는데 고릴라는 하루 종일 먹고 소화시키는 데 쓴다. 먹고 소화시키는 데 시간을 절약하고 동시에 높은 에너지를 뇌에 공급할 수 있게 되면서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생기고...(후략)

읽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고릴라였다면 어땠을까. 화식(火食) 보다 생식(生食)이 당연한 삶이었다면, 그러면 조리를 할 필요 없이 하루 종일 먹고 소화시키는 데 에너지를 쓰면서 쉴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동네는 덥다. 가장 춥다는 1월에도 영상 5°C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고, 여름은 거의 매일 32°C가 넘어가는데 가끔 38°C를 넘어가는, 여기 말로 "Triple digit temperature(화씨 100도 이상으로, 온도가 세 자릿수가 되었다는 의미)"의 날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습도는 또 얼마나 높은지. 낮에 한 번 씩 가벼운 비가 스쳐가기도 하는데, 그러고 나면 내가 실은 인간이 아니라 찜통 속의 만두인데 덜 익어서 주인님이 살짝 물을 뿌리고 마저 찌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 사람들은 그런 날 외출하는 것을 오븐에 들어가는 것 같다("Walking into an oven")고 하기도 한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는데, 아무튼 우리 동네는 진짜 진짜 덥다.


그러다 보니, 저녁 준비를 슬슬 해야 할 네 시 무렵에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기는커녕 가스레인지를 쳐다보기조차 싫은 날도 있다. 그런 날은 일전에 쓴 것처럼 브랙퍼스트 디너를 먹거나 어제 남은 것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은 요리를 해야 한다. 국만 하나 후루룩 끓이든지, 면만 후다닥 삶아 시제품 파스타 소스를 부어 먹든지, 아무튼 가스레인지 옆에 서 있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메뉴를 찾아 요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나는 한 번 씩 수육을 만든다. 냉면집에서 곁들여 파는 머릿고기나 수육을 먹은 경험 탓에 수육이 일종의 ‘여름 음식’의 이미지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걸까? 날도 덥고 입맛도 없다는 핑계로 몇 끼쯤 대충 해치우고 나면, 꼭, 수육으로 가족들 영양 보충을 좀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큰 냄비에 돼지고기가 푹 잠길만큼 물을 붓고, 양파 반 개, 통마늘 한 주먹, 통후추 약간, 된장 한 숟가락, 월계수 잎 두어 장 등을 넣고 불을 켠 다음, 팔팔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줄인다. 넘치지 않도록 가끔 들여다보면서 1시간 정도 삶으면 맛있는 돼지고기 수육이 완성된다. 가스레인지를 켜 놓아야 하는 시간은 꽤 긴 편이지만, 옆에서 계속 저어 주거나 볶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꽤 기특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완성된 수육은 냄비에서 꺼내어 도마 위에서 살짝 식힌 후 썰어 주고, 로메인 상추나 찐 양배추 같은 채소와 쌈장을 곁들인다. 가끔은 비빔 막국수를 곁들이기도 한다. 차려놓으면, 쌈채소가 있어서 그런지 뜨끈한 국물이 없어서 그런지, 아무튼 왠지 시원해 보이는, 여름에 제격인 것 같은 한 상이 된다.

아이들은 밥반찬으로 먹고, 남편과 나는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곁들인다.



전기요금에 누진세가 없어 한국에 있을 때보다야 에어컨을 마음껏 트는 편이긴 하지만, 텍사스의 여름은 덥다. 그런 여름날, 누군가에게 영양 보충을 시켜주고 싶어 한 시간 씩 냄비에 고기를 끓이는 마음, 그건 사랑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

수육은 사랑입니다. 특히 텍사스에서 삶는 수육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