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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창전골과 수제비

귀찮음을 식탐이 이겨버렸다

by 앤지

나는 소위 '아재 입맛'이다. 곱창전골과 구이, 내장탕을 좋아하고, 순댓국과 돼지국밥을 좋아한다. 크림 파스타나 마르게리따 피자 같은 음식도 매우 좋아하지만, 주기적으로 '내장류'와 '시원한 국물류'가 한 번 씩 몹시 당긴다. 스무 살 무렵에도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홍합탕을 팔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사 먹었고, 언젠가 오징어 내장탕과 닭 내장탕을 먹어보는 것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일 정도이다. (쓰다 보니 '아재 입맛'이라기보다 그냥 '먹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서양 음식은 여기서도 먹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는데, 내장이나 시원한 국물 음식은 어지간해서는 찾을 수가 없다 보니 더욱 갈망하게 되는 것뿐일지도.)

본래 나는 꽤 게으른 편에 속하지만, 특정 음식을 향한 식탐이 귀찮음, 그리고 맛있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걱정을 이겨버렸으니, 텍사스 생활 1년여 만에 곱창전골을 만들어 먹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지인이 주신 손질 곱창이었다. 남편이 회사 사람들과 곱창구이를 파는 식당에 갔다가 실수로 주문을 너무 많이 해서 굽지 않은 상태의 손질 곱창이 남았는데, 직장 상사가 그것을 집에 가져가라고 싸주셨다는 것이다.

기왕 먹을 바에는 왕창 만들어 먹으리라, 생각하고 한인마트로 가서 추가로 2 파운드(약 900g)의 곱창을 더 샀다. 그때 매대에 있던 전부였다.

그동안 한인마트에 갈 때마다 냉장 코너 한편에 곱창이 있는 것을 보고 '누가 곱창을 집에서 해 먹기는 하나 보네. 저거 그런데 손질은 다 된 걸까? 냉동이 아니라 냉장인 걸 보니 사람들이 자주 사나 봐?’ 하고 속으로만 궁금해한 지 일 년. 그 곱창을 사 가서 손질해 먹는 사람이 실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 사 오면서 '나 좀 너무했나? 다른 사람도 사 갈 수 있게 남겼어야 했는데 너무 욕심냈나?'하고 잠시 반성했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낸 손질법대로 기름 덩어리는 잘라내고 깨끗이 씻은 후 살짝 데쳤더니 아이고 이게 뭐야, 200그램 남짓으로 줄어버렸다. 원래 이런 건지, 내가 기름을 너무 많이 잘라낸 건지, 알 길은 없었지만 일단 매대의 것을 다 사온 걸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

양념장은 검색창에 '백종원 곱창전골'이라고 쳐 보았다.

혹시 아시는지. 요리나 양념 이름 앞에 백종원 씨의 이름을 붙여서 자동완성 검색어가 나오지 않는 요리나 양념을 찾는 '백종원 게임'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그것이 백종원 씨의 공식 레시피인지까지는 확인이 잘 안 되지만, 여하튼 '백종원 곱창전골'은 자동완성 검색되었고, 집에 있는 양념으로 만들 수 있고 맛있어 보이는 레시피를 찾을 수 있었다.

결과는 90% 정도 성공이었다. 가게 손질 곱창은 맛있었는데, 내가 손질한 곱창은 어딘지 좀 질겼다. 나중에 요리사로 일하시는 사촌언니와 이야기하다 보니 "다음에는 데칠 때 파인애플 주스를 조금 넣으면 좋아."라고 하셔서 해결 비법은 알게 되었지만, 너무 번거로워서 '다음' 곱창을 만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두 번째로 식탐이 게으름을 이긴 날의 메뉴는 수제비였다.

텍사스라고 해도 겨울은 제법 쌀쌀한 날들이 있다. 영하로 내려가는 일은 거의 없지만, 3월부터 10월까지 반팔 반바지만 입는 생활에 익숙한 탓인지, 핼러윈 무렵 기온이 영상 5~10도 사이가 되면 여기 사람들은 털모자, 어그부츠에 패딩까지 입고 나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다. 나도 스웨터와 긴바지를 입고 종종걸음으로 학교 앞에서 돌아서는데, 목 뒤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에 뒤통수에서 찌릿한 신호가 왔다. 잇츠 국물 타임! 이번 주말은 수제비다!


내가 사는 도시 근처에 한식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차로 40분~1시간쯤 가야 하는 곳에 몇 군데 한식당들이 있긴 한데, 불고기부터 파전까지, 떡볶이부터 소고기국밥까지(때로는 중식과 일식 메뉴도 함께) 온갖 메뉴를 팔다 보니 개별 메뉴의 전문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수제비는 없다. 반죽을 하고 뜯는 과정이 너무 손이 많이 가서 다른 메뉴들과 병행하기 어려운 탓일까? ‘저렴하게 후다닥 먹는 메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적정 가격을 받기 어렵나? 뭐, 아무렴 어때, 먹고 싶은 내가 만들어 먹으면 되지.

인터넷 검색엔진과 유*브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까. 수제비 만드는 법, 이라고 검색어를 끝까지 치기도 전에 레시피들과 더 맛있는 수제비를 위한 '꿀팁'들이 줄줄 쏟아진다.

먼저 밀가루 반죽을 만든다. 반죽에 올리브 오일을 아주 조금 추가하는 방법도 나와 있었지만 일단 기본 레시피로 가기로 했다. 랩에 싼 반죽을 냉장실에서 숙성하는 사이, 한인마트와 홀푸드마트 출신 각종 해산물로 국물을 낸다. 사실 반죽이 귀찮아서 그렇지 여기서부터는 별 것 아니다. 실시간으로 끓는 국물 냄비에 반죽을 얇게 뜯어 던져 넣을 때는 먼저 던져 넣은 반죽이 다 익어 떠오르기 전에 마지막 반죽까지 던져 넣어야 할 것만 같아 쫓기는 기분이 들어 조금 어려웠지만, 여하튼 꽤 그럴듯한 수제비가 완성되었다. 온 가족이 맛있게 한 그릇 씩 뚝딱 비웠다. 크으, 역시 쌀쌀한 날은 이런 국물을 먹어줘야 한다고!



그 후로도 가끔 식탐이 게으름을 이기는 날, 나는 문어 대신 오징어로 타코야끼(오징어니까 이까야끼라고 하는 게 맞겠다)도 만들고, 새알심을 빚어 팥죽도 쑤고, 전기밥솥으로 밤새 '찜질방 계란'도 만들며 살고 있다.

내가 먹고 싶어 내가 만든 이까야끼, 팥죽, 찜질방 계란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들과 남편에게 생색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식탐 많고 실행력 있는 엄마랑/아내랑 사는 걸 복으로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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