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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과 유부초밥

힌두교 신자 어린이와 이슬람교 신자 어린이가 동시에 놀러 왔을 때

by 앤지

미국에 온 지 며칠 만에, 당장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급하게 가르쳐 보낸 영어는 딱 다섯 마디였다.


- Where is the classroom/cafeteria/restroom?

- Can I go to the restroom?

- I have a stomache.

- Can you speak a little bit slowly? (어려우면 그냥 Excuse me?)

그리고, 뭔가 잘 안되면, 그냥 Please call my mom이라고 해.


아무리 아이들은 어른과는 다르고 언어를 스펀지처럼 흡수한다고는 하지만, 영어라고는 정말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무려 7시간 반 동안이나 있어야 하는 학교에 보내 놓고 한동안은 '혹시 학교에서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하며 하루 종일 가슴을 졸였더랬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나 학교 안 갈래.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어."라며 징징대는 일 또한 없긴 했지만.

걱정되는 마음에 학교 도서관 사서 보조, 점심시간 카페테리아 봉사 활동 등을 신청해 나도 아이들 학교를 가끔 드나들었다. 학교 안에서 나를 마주친 아이들은 친구들을 향해 "우리 엄마야.(She's my mom!)"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친구들의 대답은 주로 "그럴 줄 알았어(I knew it.)"였다. 나와 아이들은 한국 기준으로는 '붕어빵'이라고 할 수준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그냥 한눈에 내가 우리 애들 엄마라는 걸 모두가 안다.

그렇게 나도 아이들 친구들을 알게 되고, 때로는 그 친구의 엄마들과 봉사활동을 함께 하다 연락처를 주고받게 되면서, 늘 골목에 나와 노는 이웃들 외의 친구들도 생겼다. 그 아이들이 집에 놀러 와도 되냐고 물으면, 우리 아이들이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간다는 사실이 그저 기뻐서 어지간하면 거절하지 않고 오라고 했다. 우리 아이들도 가끔 그쪽 집에서 놀고 왔다.


둘째의 친구 재드(Jad)라는 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와 있던 어느 날이었다. 재드는 무슬림이니 간식으로 소고기 만두를 주려고 거의 다 찐 참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큰애의 친구, 차미카(Chamika)의 엄마였다. 차미카의 누나를 급히 어디 데리고 가야 하는 상황인데 차미카 아빠가 아직 퇴근을 안 했다며 한 시간만 차미카를 큰애와 놀게 해 줄 수 있느냐는 거였다. 한 시간쯤인데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다 싶어 그러마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차미카는 스리랑카에서 온, 소고기를 먹을 수 없는 힌두교 가정의 어린이였다. 어쩌지, 지금 집에 있는 재료가 뭐가 있지. 아이들만 두고 뭘 사러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이 먹는 만두를 보고만 있게 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냉장고를 뒤져 보니, 아이들 도시락을 싸고 남은 유부초밥 패키지가 있었다. 재료명을 뒤졌는데, 밥에 뿌리는 플레이크에도 육류 이야기는 없다. 좋아, 이걸로 결정. 그리고 즉석밥을 데우고 김도 준비했다. 치킨너겟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떤 신도 치킨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마찬가지로, 어떤 신도 채소와 해조류를 싫어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후로도 우리 집에는 다양한 어린이들이 놀러 왔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에게는 간식으로 만두를 쪄 주었고, 차미카가 있을 때는 모두에게 유부초밥이나 달걀말이를 만들어 주었다. 달걀노른자 알레르기가 있는 어린이가 왔을 때는 다시 만두를 써먹었다.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를 마실 수 없는 어린이에게 보리차를 주었더니, "이건 정말 차인가요?(Is this REAL tea?)"라고 놀라며 차에서 '빵 맛'이 나서 너무나 맛있다고, 혼자서 한 주전자를 거의 다 마시고 간 적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친구들 집에서 맥 앤 치즈, 타코, 그리고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음식들을 얻어먹고 왔다.

처음 초대를 할 때면 친구들의 엄마들은 나에게 "너네 애 혹시 알레르기나 먹이면 안 되는 음식 있어?"라고 꼭 확인을 했다. 알레르기가 있다고 해도 "안 먹어봐서 그래, 조금씩 먹어보면 나아."라며 먹어볼 것을 강요하는 일도 많고,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유난 떠는 것' 쯤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흔한 나라에서 살아온지라, 이러한 존중과 신경씀이 처음에는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나도 처음 누군가를 초대하면 알레르기나 피해야 할 음식부터 확인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특정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는 어린이, 식용색소나 식품 첨가물을 먹지 못하는 어린이, 다른 질환 치료를 위해 먹고 있는 약 때문에 어떤 성분을 피해야 하는 어린이, 집안의 종교 때문에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어린이... 주변에는 참으로 다양한 어린이들이 있었고, 조금만 신경을 쓰면 모두가 함께 먹으며 즐겁게 놀 수 있는 음식이 충분히 있었다 - 그것은 바로 김과 유부초밥. 김과 유부초밥이 세상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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