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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

자기 검열 끝에 선택된 도시락 메뉴

by 앤지

새벽부터 비가 오나, 싶었는데 스프링클러 돌아가는 소리였다.

텍사스 생활 3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스프링클러 소리는 낯설다. 촤아아 하는 물소리에 잠이 깰 때면 태어나 서른몇 살 먹도록 아파트에서만 살던 내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산다는 것도 낯설고, 그 마당에 할머니 댁 같은 텃밭이 있는 게 아니라 잔디가 깔려있다는 것도 낯설고, 그 잔디밭 곳곳에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각이 되면 앞마당부터 시작해 옆, 뒷마당 순으로 각 구역별로 6분씩 물이 나오게 세팅되어 있고, 비가 와서 흙이 젖은 날은 센서가 감지해서 물이 나오지 않는 똑똑한 스프링클러가 깔려있다는 것도 매번 감탄스럽고 낯설어, 1분쯤 ‘어쩌다가 내가 지금 여기 와 있나’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러게. 어쩌다가 나는 지금 텍사스의 한 소도시에 와 있을까.

하지만 아침시간에 1분 이상의 감상은 당연히 사치다. 얼른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을 깨워 등교 준비를 해야 한다.

이곳의 학교 스케줄은 한국에 비해 일러서 오전 8시 정도에 초등학교가 시작한다. 우리 집은 걸어서 등교할 수 있는 거리라, 7시 40분쯤 되면 등교하는 동네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있는데, 딱해 보이는 부피에 비해 무게는 그리 무겁지는 않다. 보통 도시락과 물병, 간식, 필통 정도가 들어있고, 스쿨 런치를 사 먹는 날은 도시락도 없이 물병, 간식, 필통만 들어있다.


이곳 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먹을 것 관련하여 두 번 놀랐는데, 첫 번째는 도시락만이 아니라 간식까지 싸 보내야 한다는 거였고, 둘째는 도시락에 간식까지 싸는 게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거였다.

간식 이야기부터 간단히 하자면, 아이들을 등록시킨 날 안내를 해 준 교직원이 ‘아이들은 배가 자주 고프니까 교실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싸주라’고 했다. 원칙은 딱 두 가지.

"노(No) 요거트(숟가락이나 도구가 필요한 음식은 안되고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어야 한다), 노 치토스(도서관 책이 모두 노랗게 된다고 한다)."

나는 주로 포도, 방울토마토처럼 한 입에 들어가는 과일이나 소포장으로 파는 젤리를 간식으로 들려 보냈다.


도시락을 싸오지 않으면 끼니당 $2~3 정도에 사 먹을 수 있는 스쿨 런치가 있긴 한데, 한국 엄마의 눈에는 도저히 학교에서 주는, 그러니까 뭔가 ‘권장할만한’ 메뉴들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알레르기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아이들이 무난하게 좋아하는 메뉴가 돌아가며 나오는데 보통 치킨너겟, 페퍼로니 피자(채소는 한 조각도 없고 페퍼로니만 얹어져 있다.) 또는 햄버거(정말 빵 사이에 햄과 치즈만 딱 들어있다!)가 메인 메뉴이고 음료로는 딸기나 초코나 흰 우유를 선택할 수 있고(그럼 대체 어느 어린이가 흰 우유를 선택한단 말인가!) 베이비캐럿 한 봉지나 사과 한 두 조각이 애써 건강을 아주 무시한 건 아닌 듯이 보이는 역할을 담당하며 함께 나온다. 양도 아이들이 2~30분 안에 다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한 탓인지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통으로 평균을 잡은 탓인지 여하튼 많지 않아서, 딱 아침과 간식 사이에 필요한 열량만 간단히 채워주는 느낌?

'이런 걸 먹고도 잘도 저렇게들 다리도 쭉쭉 길어지고 체력도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는구나, 우리 애들은 이제껏 1식 3찬에 국 또는 찌개까지 매일같이 챙겨 먹였는데도 얘들보다 작네.'

하는 허탈한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메뉴였다.

한국식 기준으로는 말 그대로 영양이 아닌 열량만 가득해 보이는 데다, 나는 10여 년의 워킹맘 생활을 마치고 전업맘으로서의 새로운 생활에 두근두근하고 있었기에 도시락을 한 번 싸 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도시락을 싸려고 보니 메뉴가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10% 정도의 아시안이 있는데 대부분 인도 베트남 아이들이고 동북아시안은 손에 꼽을 정도다. 특이한(이라고 쓰고 이상한 이라고 읽는) 것을 먹는 특이한 아이로 보이게 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싸는 게 좋을까. ‘남이사. 뭘 먹든 누구한테 피해만 안 끼치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아직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혹시라도 받을지 모르는 상처는 걱정이 되었다. 일전에 공원에서 ‘문 드롭(Moon drop)’이라는, 미니 사이즈 가지처럼 생긴 포도가 이름이 너무 예뻐 먹고 있다가, 여기 사람들에게도 낯선 신품종이었던 것인지 ‘저 사람은 뭘 먹는 거야’라는 의미가 분명한 눈길을 받아본 경험이 나를 평소보다 더욱 소심하게 만들었다.

김치류는 당연히 안 되겠지, 마늘 냄새나는 것도 빼자. 아니 근데 잠깐, 마늘은 이탈리안에도 엄청 들어가지 않나? 왜 ‘우리 마늘’만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거야, 쳇….

문드롭. 낭만적인 이름에 무척 맛있지만 생긴건 좀 특이한 포도다. 한국에서도 다른 이름으로 팔리는 것 같았는데..

고민 끝에 선택한 메뉴는 볶음밥이었다. 프라이드 라이스(Fried rice)라고 하면 많이들 들어봤겠지, 싶어서. 무난한 샌드위치도 종종 싸주었지만, 아이들은 아무래도 버터나 소스류를 바른 지 시간이 지나 눅눅해진 빵보다는 밥류를 더 익숙해하고 좋아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각종 다진 채소-당근 양파 감자 버섯 파 등 있는 것 아무거나-를 볶다가 채소가 반쯤 익었을 때 밥과 햄, 소시지, 다진 고기 등을 넣고 볶는다. 마지막에 소금으로 살짝 간을 맞춘다. 소금 대신 ‘연*’라는 조미료나 일본식 쯔유를 한 숟갈 넣어주면 더 맛있다. 채소만 넣은 볶음밥일 때는 마지막에 둥글게 뭉쳐서 김가루에 굴려 주먹밥처럼 만들기도 한다.

매일같이 아침마다 밥을 볶다 보니, 비법이라고까지 하기엔 민망하지만 나름의 소소한 비법도 생겼다. 볶을 밥을 미리 그릇에 퍼 두고 살짝 식힌 후 날달걀을 비벼두었다가 팬에 투하하면, 볶음밥이 완성됐을 때 밥알 한 알 한 알이 달걀에 코팅되어 점심시간에 먹어도 떡짐이나 뭉침이 덜하다.

처음 몇 주는 무거울까봐 일반 도시락에 싸주었는데, 가방에 들고 다닐 물건이 생각보다 없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보온도시락에 싸주었다.



가끔 아이들을 볼 겸, 런치타임에 학교로 봉사활동을 가기도 했는데, 우리 아이들의 도시락 메뉴를 이상해 하는 친구들은 없어 보여 안심했다. 30개국 이상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며 다양성을 자랑하던 학교이니, 아이들은 "낯선 음식을 싸온 친구가 있어도 이상하다고 하면 안 된다"고 세련된 교육을 이미 받았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소심한 엄마는 안심하고 계속 볶음밥을 고정 메뉴로 써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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