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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랙퍼스트 디너(Breakfast-Dinner)

밥하기 싫은 날

by 앤지

밥하기 싫다.

가족의 식사 준비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니,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오늘은 또 뭘 먹나. 뭘 해 먹이나. 아아, 밥하기 정말 싫다...!


혼자, 아니, 남편과 둘이 살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한 번쯤 배달음식을 먹어도 되고, 여차하면 간식류로 때워도 되고, 이도 저도 귀찮으면 한 끼쯤 굶어도 문제없으니까. 요리는 그야말로, 내가 해 먹고 싶은 걸 해 먹고 싶을 때 해서 먹는 즐거운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들은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데, 골고루 영양을 섭취해 자라야 하는 시기이기까지 하다. 배달이 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대체로 맵거나 짜고 양도 아이에게 맞지 않고.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란 참으로 강력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해 먹고 싶은 걸 해 먹고 싶을 때 요리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먹어야 할 혹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끼니때에 맞춰 준비해야 했다. 출근을 하는 평일에는 베이비시터 이모님께 그날 해주셨으면 하는 반찬을 말씀드렸고, 필요한 재료를 온라인으로 장을 보아 준비해 놓았다. 주말은 내가 요리를 했다.


원래 나는 집안 살림 중에 요리를 가장 좋아했다. 그때그때 먹고 싶은 것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곤 하는(이런 게 식탐인가?) 성격인 데다, 집안일 중에 창의력이 발휘될 여지가 가장 많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요리가 좋았다. 하지만 요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이 되면서 ‘내가 정말 요리를 좋아했나? 내 착각이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날도 많아졌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소원이 하나 생겼는데, 십여 년째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주 위대한 과학자가 ‘모든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고 적당한 포만감까지 주는 알약’을 만들어주는 것. 기왕이면 가격까지 적당하여 집에 구비해 놓고 언제든 요리하기 싫은 날은 가족 모두 그걸로 한 끼를 때우는 것. 모르긴 몰라도 개발이 엄청나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고 개발하기만 하면 대박 날 것이 분명한(나 말고도 이런 소원을 가진 주부는 엄청 많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아이템이 아직도 시중에 없는 이유는 과학자들 대부분이 ‘먹는 낙’으로 힘든 연구와 실험을 견디는 남성들이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내심 짐작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요리를 좋아하기는 한다. 지금 구할 수 있는 재료와 며칠 안에 처리해야 하는 재료를 조합해 최근 한동안 먹지 않은 메뉴를 꽤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고 재료를 낭비 없이 처리했을 때 느껴지는 희열감, 그걸 가족들이 맛있게 먹을 때의 기쁨은 다른 집안일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여하튼, 밥을 차리자니 국 한 가지, 메인(main) 반찬 한 가지, 김치와 밑반찬 한 두 가지 - 이 정도는 갖추어야 하겠더라.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사람이 없으되 나는 학교 급식을 먹을 때부터 별생각 없이 내가 먹어온 ‘1식 3찬’을 최대한 충실하게, 그러나 매우 스트레스 받으면서 실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덜컥, 미국에 오게 되었다. 텍사스의 대도시 옆에 붙은, 어릴 적 사회 시간에 배운 개념으로 말하자면 조용한 ‘베드타운(Bed town)’. 엄마가 전업주부인 가정이 많고, 외식을 할 메뉴도 다양하지 않은 동네.

지금은 좀 더 가까운 곳에 한 군데 더 생겼지만, 일단 한인마트가 고속도로를 타고 50분을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미국에 중국마트는 한인마트보다는 많이 있다는데, 우리 동네 중국마트는 한인마트 옆에 있었다. 가보면 있는 식재료도 한국에서 보던 것들과 미묘하게 다른 경우가 많아 대체품으로 이것을 사도 좋은지 아닌지 모르겠기에 일단 ‘밑반찬’부터 빠르게 포기했다. 좋아, 모든 식사는 이제부터 '1식 1찬'이다.

약간 벗어나는 이야기인데, ‘밑반찬’을 포기하자 메뉴 스트레스도 줄었지만, 식재료 재고 관리가 단순해지고 같은 반찬이 냉장고를 여러 번 들락거리다 결국 버려지는 일도 없어졌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 밑반찬 안 먹기가 이렇게 건강과 환경에 이롭습니다. 모두 밑반찬을 포기하세요.


이웃들과 조금 친해지고 나서는 “저녁은 뭐 먹어요?”를 가끔 물어보았다. 치킨, 파스타, 타코, 피자, 샌드위치, 가끔은 스테이크 같은 대답이 주를 이루었는데, 어느 날 한 이웃이 해준 대답이 너무 신선했다.

“오늘 너무 요리하기 싫어서 우린 브랙퍼스트 디너를 먹을 거야.(We’ll have breakfast-dinner, I am not gonna cook today.)”

“그게 뭔데?”

“시리얼이랑 도넛. 하하하.”

말 그대로 아침식사로 먹을 법한 간단한 것을 저녁에 먹겠다는 거였다. 그거 참 기발하고 우아한 표현이다 싶었다. “대충 때울 거야.”보다야 “브랙퍼스트 디너를 먹을 거야.”가 훨씬 긍정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아침으로 먹는 간단한 것은 무엇이든 ‘브랙퍼스트 디너’가 될 수 있다! 사진은 우리 애들이 좋아하는 오차즈케.

그래, 주부도 사람인데. 더구나 여름이면 38도를 아주 우습게 넘나들고 습하기까지 한 이런 동네에 살면 가끔 브랙퍼스트 디너를 먹는 건 가정의 평화와 요리 담당 가족 구성원의 건강을 지켜주는 삶의 지혜일 수도 있겠다, 하는 다소 오버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여하튼 그래서 우리 집도 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은 시리얼이나 도넛, 오차즈케(녹차에 밥을 말아먹는 것) 등으로 ‘브랙퍼스트 디너’를 먹는다. 절대 대충 때우고 넘어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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