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를 먹으려고 고기를 샀다
양가에서 팍팍 주시는 전라도식과 대구식 김치를 골라가며 먹던 '김치 금수저' 출신 우리 가족의 눈높이-'입높이'라고 해야 하려나?-에 100%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한인마트 김치도 꽤 먹을만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시어머니 말씀에 서운해 김치를 담그지 않으리라는 어깃장 심보가 들었다 한들 나는 진작 “에잇, 차라리 내가 담가 먹는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전 글 '김치' 참조 https://brunch.co.kr/@angie0730/15)
맛있는 음식을 향한 나의 욕심은 게으름도 귀찮음도 이기는, 거의 천하무적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인마트 김치 코너에 가면 한국에서도 많이 본 종*집, 양* 김치 외에도 로컬 브랜드들도 몇 가지가 있어 선택지는 의외로 많은 편이다. 한국 브랜드 김치는 포장 단위도 작고 비싸서 주로 로컬 브랜드의 김치를 산다.
배추김치로는 포기로 된 것과 썰어진 ‘막김치’가 있고, 백김치와 깍두기도 자주 눈에 띈다. 열무김치, 파김치는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반반쯤 되는 것 같고 동치미와 갓김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우리 가족은 막김치와 이따금 깍두기 정도면 대체로 만족이다.
검색해보니 로컬 브랜드 김치 가격은 한국과 비교하여 크게 비싸지 않은 것 같다. 한국에 살 때는 김치를 마트에서 산 일이 거의 없었고 엄마의 김치 냉장고가 마치 내 것인 양 퍼다 먹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비싸게 느껴지지만.
김치를 사 오면 우선은 그냥 반찬으로 먹는다.
우리 집은 '1식 1찬'이 원칙이지만, 김치는 예외로 늘 밥상에 오른다. 하긴, 중학교 가정 시간에 배운 바에 의하면 3첩 반상, 5첩 반상 등에서 반찬의 가짓수를 셀 때 원래 김치는 빠진다. 그걸 배울 때 “이렇게 정한 인간은 틀림없이 자기가 반찬 안 만드는 남자 양반이다!”라며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그 양반님네에게 동조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여하튼 우리 집은 정확히 말하면 '1식 1찬+김치'이다.
김치 한 통을 거의 다 먹고 마지막 채소 조각과 국물이 남을 즈음에는 김치찌개를 끓인다.
나의 엄마는, 아마 한국 엄마들이 다들 그러시겠지만, 음식을 남기는 것을 호락호락 봐주지 않았다. 농부의 딸이어서인지 특히 밥이나 쌀의 낭비를 참지 못했다. 진짜 배가 꽉 차서 더 들어갈 데가 없는데
"아 이걸 누구 코에 붙여?"
하며 마지막 한 숟가락을 먹기를 요구했고, 나는
"꼭 코에 붙여야 돼? 그냥 붙이지 마!"
라고 하다가 등짝 스매싱을 당하곤 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채소 반찬을 남기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는데, 엄마의 논리에 의하면 푸성귀는 키우는 데 두서너 달이 걸리지만 쌀은 일 년이 꼬박 걸려서 그렇단다. (물론,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뿐이지 채소 요리라고 해서 남기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요즘은 접시에 조금 남은 쌈장이나 한 두 조각 남은 된장국 속의 감자 같은 건 버리시지만, 그럴 때마다
“에이, 버려버려. 이걸 보관하려고 다시 부어서 끓이고 접시 하나 더 꺼내고 하는 게 더 낭비야.”
라고,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변명하듯 중얼거리시는 것을 보면, 음식을 버리는 것에 대한 터부(Taboo)가 엄청난 것 같다.
엄마의 딸인 나도 음식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강한 터부를 가지고 있다. '음식 버리면 죄받을 것'같은 찜찜함을 가지고 있고, 요리할 때도 식재료를 낭비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런 관점에서 한 번 씩 내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요리가 바로 김치찌개이다.
나는 김치찌개를 찌개와 찜의 중간 정도 되게 자작하게 끓인다. 냄비 바닥에 무나 양파를 깔고, 마지막 남은 김치를 국물까지 알뜰하게 붓는다. 돼지고기를 얹고, 다진 마늘과 대파를 듬뿍 추가한 후 물을 조금 더 부어 내용물이 잠길락 말락 하게 만든 후, 한참 끓이면 완성이다.
보통은 달걀 프라이를 얹어 밥과 함께 비벼먹고, 두부를 곁들이기도 하는데 이때만큼은 평소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소주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한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한국에서라면 지겹도록 먹었을 요리이지만, 여기서는 아무래도 자주 먹기가 어려워서인지 김치찌개를 해주면 아이들이 엄청나게 좋아한다. 평소에는 밥 먹을 시간이라고 몇 번이나 불러야 느리적거리며 식탁 앞으로 오기 일쑤이지만, 김치찌개 냄새가 나는 날은 찌개가 다 끓기도 전에 부엌 근처에서 알짱거리며 기다리곤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 집 김치찌개는 약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요리이다.
김치통 바닥에 조금 남은 김치가 아까워서 돼지고기와 두부를 사고 무와 양파, 대파를 사다가 듬뿍 넣어서 만드는 셈이니까. 금액만 생각해 보아도 남은 배추 조각과 김치 국물보다 고기, 두부 등이 훨씬 비싼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일부 재료들은 동네 마트에서는 해결이 안 되고 꼭 한인마트까지 가야 하니, 그 시간과 귀찮음도 만만치 않다. 솔직히 말하면, 얼마 안 되는 남은 김치를 그냥 버리는 것이 더 '합리적인' 행동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김치 한 통을 다 먹어갈 즈음마다 꼬박꼬박 김치찌개를 만든다. 아이들이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식재료를 낭비 없이 사용하는 '도덕적이고 알뜰한 요리사'가 된 것 같달까, 엄마가 알면 칭찬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으니(?) 엄마랑 통화할 때 나이 마흔에 김치찌개 끓인 정도로 자랑을 늘어놓지는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