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지 Sep 25. 2021

영혼을 위한 마라(麻辣)

나의 '닭고기 수프', 마라탕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라는 책을 읽었거나 기억하고 계신 분이 있을지. 류시화 시인이 번역하신 책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여러 번 증쇄를 하면서 중간에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고 번역 제목이 바뀐 듯하다. 미국에서 카운슬러, 강사로 활동하던 잭 캔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이 평범한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로 모아 엮은, 잔잔하고 따뜻한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책 제목에 쓰인 '닭고기 수프'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몸이 아플 때 엄마나 할머니가 끓여주시는, 따스함과 위로를 상징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삶에 지쳐 기운과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저자의 집필 의도와 딱 맞는 음식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런 용기와 위로를 주는 음식을 묻는다면 아마 '어머니의 된장국' 같은 대답이 나올 듯한데, 내게 있어 이 '닭고기 수프'에 해당하는 음식은 마라탕이다.

닭고기 수프나 된장국 대비 너무 자극적인 음식 아니냐고? 모르는 말씀. 중요한 포인트는 슴슴한 간이나 부드러운 식감이 아니라, 어머니가/할머니가 '해주신다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지쳐있는 내가 직접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한 것을 사 먹거나 얻어먹어야 스트레스가 쫘악 풀리면서 든든해지고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이 새롭게 솟아나는 법이다.



오래전, 베이징에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 분들과  같이 저녁을 먹는데, 시뻘건 국물에 선지,  , 천엽  내장에 *햄과 생선살, 숙주까지 도대체 공통점도 연관성도   없는 재료들이 모조리 들어가 있는,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 좋아할지 몰라  넣어봤어" 식의 요리가  시선을 끌었다. 낯선 음식도 넙죽넙죽  먹어서 친구들로부터 " 독살하기 쉬울 거야." 소리를 듣곤 하는 나는 물론  요리를 냉큼 먹어보았다. 그런데    없는 요리가 너무너무 맛있는 것이었다! 맛있다 소리를 반복하며  그릇이나 덜어다 먹었다.

그 음식을 주문한 현지 직원분은 한국에서 온 출장자 중에 그걸 맛있다고 한 사람이 딱 두 명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라며 요리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마오슈에왕(毛血旺)'이라는 사천 전통 요리로, 각종 내장과 채소, 오리의 피로 만든 선지를 넣고 얼큰하게 끓인 것이었다. 내장이야 내가 워낙 좋아하는 식재료니까 그렇다 치고, 매우면서도 묘하게 중독성 있는 국물이 매력적이었는데, 그것이 내가 태어나 처음 먹어 본 '마라(麻辣)'가 들어간 요리였다.

내가 마라를 잘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분은 출장 기간 동안 마라샹궈 집, 훠궈 집 등을 데려가며 나를 마라의 세계로 인도해 주셨다.


그 후로 나는 마라가 들어간 음식을 종종 일부러 찾아서 먹게 되었다. 마오슈에왕을 파는 집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훠궈나 마라샹궈를 파는 집은 가끔 있어 다행이었다. 몇 년 후에는 회사 근처에 사천 음식점까지 생겨 내 '마라 사랑' 행보에 도움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텍사스로 이사 오고 난 후, 한동안 마라가 들어간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중국 음식점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 아메리칸 차이니즈(America Chinese), 그러니까 미국식으로 현지화된 중국 음식점들이었다. 중국식에 가깝다 해도 사천 음식을 다루는 곳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쉬운 대로 한인마트에서 '충칭소면'이라는, 마라가 들어간 인스턴트 라면을 종종 사다 먹곤 했다.

몹시 후진 번역기를 돌린 것인지, 포장의 'Instant Noodle'이 '즉시 누더기'라고 되어 있다.

그러다 몇 달 전, 사천 음식점이 집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생겼을 때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게다가 최근에는 훠궈를 파는 음식점까지 생겼으니, 텍사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싶다.

사천 음식점에서 주문한 음식 몇 가지

훠궈 집은 아직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는 날 낮에 둘이서 딱 한 번 가 보았을 뿐이지만, 사천 음식점은 가끔 주문해 먹는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비교적 순한 마파두부나 어향가지 같은 요리를 주문하고, 스트레스를 받은 나를 위해서는 마라가 듬뿍 들어간 소고기 볶음이나 매운 생선 요리와 맥주를 곁들인다.

혹시나 하여 구*맵에 'Mao Xue Wang'을 검색해보니 중국 본토에 위치한 음식점이 가장 가깝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여전히 당분간 마오슈에왕은 마음을 비워야 할 것 같지만, 이 정도면 내 영혼을 위한 마라 농도를 유지시키기에는 충분하다.


몹시 지친 금요일 저녁, 맥주 한 잔을 따라 놓고 매콤 얼얼한 마라 양념을 밥에 야무지게 얹어 먹으면, 몸에서 살짝 열이 나는 느낌이 들면서 또 다음 주를 살아갈 기운이 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금요일 저녁이다. 오래간만에 사천 음식점에 주문을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