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싫어지는 먹을 것
나는 어지간한 음식은 맛있다고 느끼는 편이고, 소위 ‘진입장벽’이 높다고 알려진 음식들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배가 불러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새로운 음식을 보면 ‘호기심의 한 입’을 거절하지 못하는 식탐의 여왕이기도 하다. 어릴 적에는 싫어했던 당근과 가지도 잘 먹는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했으나, 이런 나에게도 점점 싫어지는 먹을 것이 있으니, 바로 ‘나이’이다. (음, 이런 것도 '아재 개그'에 속하려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믿고 싶지만, 두 아이를 낳고 삼십 대 중반을 넘어 노화의 시작이 슬슬 느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나이를 먹는 것에 더 이상 무덤덤하지만은 않아졌다. 미국에 와서 좋은 점 중 하나가, 알량하지만 한국 나이보다 한두 살 어려진다는 점일 정도로.
모두 알다시피 한국의 나이를 세는 방식은 독특하다. 태어나자마자 0살이 아닌 1살이고, 같은 연도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같은 나이로 '동갑'이며, 1월 1일에 전 국민이 한 살을 더 먹는 방식. 서양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이렇게 나이를 세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들었다. 다소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산정 방식이고, 결국 보험사나 병원 등에서는 ‘만 나이’를 따로 사용하게 되는 탓에 “대체 현대에 와서는 존재의 이유가 있나?”하는 의문도 갖게 하는 ‘한국 나이’. 나는 이것의 유일한 효용을 외국인과 만났을 때 ‘아이스 브레이킹’이나 농담의 소재로 써먹는 데서 찾았다.
십 년도 더 전, 스페인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에 도착하니 저녁 6~7시쯤이었을까. 한국 기준으로는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만나기로 한 상대방은 나와 모시고 간 임원분이 짐을 풀고 나올 수 있도록 여유를 두고 9시에 만찬을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이쪽이 임원을 모시고 간 만큼, 상대도 임원급이 참석하시는 자리. 나 따위 쪼렙은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자리였으나 내 생체 시계는 새벽 4시에 무슨 밥이냐고 당장 자라는 신호를 계속 보냈고, 초반은 그럭저럭 버텨내었으나 음식이 배에 차고 심지어 와인까지 곁들여지자 거의 미칠듯한 지경이 되었다. 보다 못했는지 상대방 쪽 한 분이 말했다.
“앤지 씨, 힘드시죠? 상무님이 오늘밖에 시간이 없으셔서 무리하게 식사를 잡았습니다. 그래도 스페인식으로 늦게 마치지 않고 곧 방으로 들어가실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졸려하는 모습을 처음 대면하는 상대방에게 보였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지며 잠이 확 달아났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오는 동안 한 살 어려져서 체력이 남아돌아요.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러자 그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게 '한국식 나이 세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나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텍사스에서도 처음 만난 이웃들에게 한국식 나이를 설명해 주면 열이면 열, 모두 신기해했다.
이웃 “왜 태어나자마자 0살 아니고 1살이야?”
나 “우리는 태아였던 시간도 계산하거든.”
이웃 “말 되네(That makes sense!). 그런데 왜 1월 1일에 모두가 나이를 먹어?”
나 “음, 솔직히 그건 나도 모르겠어.”
이웃 “그럼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는 다음날 두 살 돼?”
나 “응.”
태아 시기도 계산하는 과학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아시아 문화가, 갑자기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비합리적인 문화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웃 “?! 매우 이상해!”
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쨌든 난 여기서 한 살, 때로는 두 살 어려져서 아주 좋아. 하하하.”
이웃 "그럼 생일은? 생일을 Celebrate 하기는 하지?"
나 "응, 생일은 챙기지. 미역국이라는 Birthday treat을 먹어.”
이웃 "그렇구나. 흥미로운데!”
어느 날, 우리 맞은편 집 앞마당에 Yard Sign이 세워졌다.
이곳 사람들은 가족의 생일이나 새 가족의 탄생, 졸업, 입학 등 특별한 날에 앞마당에 축하 팻말을 꽂는 경우가 왕왕 있다. 때로는
"HAPPY 6TH BIRTHDAY, BRYAN"
같은 식으로 주인공의 이름과 나이까지 드러나는 팻말을 꽂기도 해서, 소심한 나 같은 사람은 보면서 '개인정보가 너무 많이 드러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보통은 어린이의 생일에 세우지만, 우리 맞은편 집은 특이하게
"43 IS A NEW 42!"
라는 야드 사인을 세워서 이웃들의 눈길을 끌었다. 한 이웃이 말했다.
이웃 A "하아, 내 남편이 내 43번째 생일에 저런 야드 사인을 세우면 남편을 죽여버릴 거야."
이웃 B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저 아내는 정말 마음씨도 좋다고."
내가 생각한 이미지 속에서는 나이 따위 쿨하게 숫자로만 여기고 살 것 같았던 여기 사람들도 나이를 먹는 게 싫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이웃 A "그러고 보니 앤지, 한국은 생일에 나이 안 먹는댔지?"
나 "응, 대신 1월 1일에 먹지만. 생일에는 안 먹지."
이웃 A "그럼 생일은 완전히 그냥 좋은 것만 누리는 거구나! 나이는 안 먹고. 좋은데?"
나 "오!"
나이 좀 그만 먹고 싶다, 라는 생각이 슬슬 들 나이대의 사람들에게는 한국식 나이를 사용하면 생일이 나이는 안 먹고 선물만 받는, ‘꿀 빠는’ 이벤트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한국식 나이 세기의 두 번째 장점.
하지만, 한국식 나이 세기는 내 생각에 부정적인 것을 초래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다.
이곳에서는 연중에 수시로 각각 나이들을 먹으니 '동갑'이라는 개념도 당연히 희박하고, 같은 반에 있는 어린이들끼리도 두어 살씩 차이가 나는 경우는 흔하다. 어른들끼리도 서로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난다는 것을 잘 계산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위계나 "이 나이에는 이 정도를 이루어야 한다/뭘 해야 한다"는 류의 압박도 덜한 사회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문화 속의 엄격한 위계나 나이에 따른 성취 압박이 한국식 나이 세기에서 오는 것이라고만 하기는 어렵겠고, 그러니까 한국 나이를 '만 나이'로 대체한다고 해서 이러한 문화가 한꺼번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여기 사람들이 나이를 먹는 슬픔(?) 때문에 생일 선물과 이벤트가 주는 기쁨이 조금 희석된다고 느끼는 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생일에 선물을 받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나이를 먹는 슬픔을 중화시킬 수 있을 테니, 우리도 만 나이를 사용하여 '글로벌 스탠더드'에 더 부합하게 다가가는 것은 어떨까.
뭐, 꼭 내가 한국 나이로 올해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더 강하게 드는 생각인 것은 아니다.
*Header photo by Anna Vander Ste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