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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쌤 Jan 11. 2024

누구에게나 숨겨진 마음이 있다(0일차)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전체의 내가 아닐 수 있다.가 아니라

전체의 내가 아니다. 분명하다. 


아직이라는 단서를 붙여도될까?

아니면 계속일까?


분명한건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전체의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정신분석에 대한 거부감 같은것이 있었다. 

이 책을 두번째 읽는 것인데 

처음 읽었을때까지만 해도 '정신분석'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읽었던것 같다. 


분명히 저자가 저렇게 말함에도 불구하고 의심과 불신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정신분석학이 

모든 심리학의 출발과 기반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그 이유를 

이제 조금씩 알것 같기도하다


두번째 이 책을 시작하면서 

저 글을 읽는 자세가 달라졌다


첫번째는 "그래봐야 정신분석하지? 어디 한번 말해봐"라는 불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항이 였다면

두번째 만남에서는 부드럽고 온화함으로 저항을 내려놓고 마주앉아 허심탄회 속내를 풀어보려고한다






사람이 변함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사람의 형상, 드러남은 변함이 없는데 의식의 변화가 얼마나 신비로운가?


이 페이지의 말들이 -가 아니 +의 에너지로 들리고 받아들여지니 말이다. 

같은 문장인데 말이다


"한 사람의 역사를 반영한다"

"겹겹이 쌓인 개인의 역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그 증상은 

드러남은 아픔일수 있으나 


본질은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며,

즉 얼마나 친절한가 아픔의 원인을 드러내주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더 감사하게도 

드러남은 아픔일수 있으나


심지어 "미래에 일어나게 될 무언가의 징후 내지는 전조"까지 미리 알려주니

즉 나는 대비할수 있고 무방비상태도 마주하는 아픔을 당하지 않을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한다


즉, 드러난 현상에 집중하면 아픔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이 또한 그것이 드러나야만하는 나의 소중한 일부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다


"불편함을 주는것은 사실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람에게 그 증상이 불가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증상은 살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


얼마나 친절하가

얼마나 자애로운가

나를 지키기위한것이였지

결코 나를 괴롭히기 위한것이 아니였다


얼마나 억울했을꼬

나를 위해 그렇게 소리쳐 외치고 드러내어주었건만

비난받고 증상이 드러날라치면 제거해야만한다고 했으니


나의 아픔 또한 진짜 사랑할수 있게 되었구나


그러고 나니 살나날수 있었던거였구나 너와 내가 함께.




매우 많은 중요한 기억들은 상당 부분 망각된 채 존재함을 기억해야한다. 


물론 그 부분의 기억, 감정 또한 맞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야한다.


그랬을때 주변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해가뜨면 안개가 사라지듯  뚜렷해진다

두면 해는 뜨고 안개는 걷히기 마련이건만

거부하고 붙잡고 있었던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러한 나의 선택 또한 존중한다

그러한 나의 선택 또한 최선이였을것이다


결국은 너의 행복도 불행도 모두 너의 탓!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아픈적이 있었지만 


나의 불행을 붙잡고 있었던 나도 그래야만 살수있었기에 붙잡고 있었던 나이고 그런 힘이 있던 나였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선택할수 있었던 나도 그런 힘이 있는 나 인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한순간도 내 삶을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고 이끌려 살지 않았던 주체적이고 주도적인였던 나인것이다.


무의식에 대한 거부감이 무엇이였을까 생각했을때

항상 그게 싫었다.  뭐만 하면 무의식이래. 가 첫번째였다면

내가 어찌할수 없는 무의식은 어찌하라는 말이냐 라는 거부감이였다.


본문에서 말한다 


"비록 기억할수 없어 의식화시킬수 없지만

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역사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재연하게 된다"


어? 그렇다면 재연되는 것이라는걸 알아차리면

 그 무의식은 의식화된것이고 의식안에서 내가 핸들링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무의식의 의식화'의 알아차림. 

그런데 그것은 관계 안에서 재연됨 .


어? 이거다! 


정신분석학을 공부할때면 항상 내면에 

"그럼 내가 병자란 말이냐! 그럼 병자 아닌 사람이 어딧냐?"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어? 이 저항감은 어디서 오는것인지?

이 저항감은 정확히 무엇인지 실체를 마주하고 싶어졌다


나 많이 용기 있어졌고 

저항앞에 교양있게 마주할수 있게 되었구나 


참 기특하다




"내 안에 있었으나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된 채 존재하는

나의 일부분"은


"대인관계 안에서"

"살아나고 움직이고 표현된다"


이를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전체로 이해하고 

수용할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보다 여유롭게 조망하고 존중할 수 있는 새로운 이해와 관점을 얻게 될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마음이 치유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하다"


"통합되지 못했던 나의 일부분이 

사람과 만나 형성되는 다양한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서 표현되는지 볼수 있고

그 가운데 치유를 경험"


.

.

.


오~~ 

잠깐만. 


그러니까 내가 맺는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현상은

무의식의 의식화의 일부일 수 있고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

또는 무언가의 징후 일수 있다


다른 사람도 그러하다.


정신분석학을 인간이해의 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존재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사랑을 담아 바라보아야 하는거지





나는 용기가 생겼다

나는 나를 돌아볼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더불어 다른 사람의 이해할수 있는 사랑의 그릇을 오늘도 조금 더 다듬었다.






.

.

.




이 모든 내면의 과정을 배우고 있는 '사람앤사랑 연구소'를  

나의 경험 체험과 함께 소개하지 않을수없다

 

사람앤사랑코칭심리연구소(주)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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