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빗줄기를 오래도록 맞고 싶었던 날들
또 비다. 밤새 퍼붓더니 지금은 좀 잦아들고 있다.
뒤 창을 열고 산이, 산의 나무들이, 풀들이 비에 젖는 모습을 바라본다. 간간이 새소리도 들린다. 비가 오면 새들은 숲의 어딘가에 숨어서 비를 피하겠지. 그러나 모든 새들이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언젠가는 창밖으로, 전깃줄에 앉아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는 새를 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승희씨는 소박을 맞았나 보다 했고, 나는 '낭만새'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 문득 새들도 저마다 다른 기질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그 새는 세찬 빗줄기를 꼼작도 않고 오래도록 맞았고, 나는 가서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그 이유가 궁금했다. 너 무슨일 있니?
-박계해, '빈집에 깃들다' 중에서
세찬 빗줄기를 꼼작 않고 오래도록 맞고 싶었던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나는 사람이기에 그 모습이 낭만적으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며 그 누구도 내게 다가와 무슨일 있냐고, 괜찮냐고 묻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그저 속으로 울음을 삼키기만 했었다. 더 나이가 들어서는 세수를 자주했고 샤워 시간이 길어졌다. 세수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기다란 샤워 물줄기 소리는 내 흐느낌 마저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완전 범죄였다 그건. 정말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로 그렇게 긴 시간을 나는 혼자 털고 일어나는 연습을 했다. 그게 얼마나 외롭고 두렵고 고통스러운지 절절이 느끼면서. 아무리 흘려도 흘려도 눈물은 자꾸 나왔다. 나는 매일 완전 범죄를 저질렀지만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변태스러운 쾌감도,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자신감도 차오르지 않았다. 그건 내가 잘못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딘가로 쓸쓸히, 그리고 점점 무거워져만 가는 몸과 마음을 가진 채로.
나는 세상과 단절된 깊은 절망의 통로로 걸어들어갔고 그 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나를 찾아내, 내 손을 잡고 한 걸음씩 함께 그곳에서 빠져나왔다면 내 치유 과정이 덜 힘들었을까. 지금 이렇게 회상하며 치유의 과정이었다 말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다르게 기록되었을까. 글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있다. 혼자 할 수 밖에 없었기에 바닥을 치고 일어나야 겠다는 마음의 결단이 정말 내 마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는 것. 옆에서 누가 나를 설득하지도, 강요하지도, 멀쩡하게 생기고 배운 인간이 대체 뭐하는 거냐며 비난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렇게 절절히도 필요한 혼자의 시간. 혼자를 위한 시간. 혼자 있어도 좋은 시간이 있다. 지금 여러분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진작에 흘렸어야 할 눈물을 마음껏 흘리고, 잠시 쉬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깨닫고, 왜 이렇게 힘든지를 곱씹는 대신, 그럼 앞으로 덜 힘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는 삶의 휴식기를 보내는거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누군가에겐 더이상 미뤄서도 안되고 결코 미룰 수도 없는 안식년임을. 머리 희끗한 노년기에만 누리는 호사가 아니라 꼭 필요한 시기에 앞당겨 쓰면 더 유용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라는 걸 알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