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내 옆에 자꾸만 ENFP들이
ENFP 후배와 출장을 갔던 이야기를 적은 글이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나 보다. 너무 다른 것 같으면서도 꽤나 잘 맞는 ESTJ와 ENFP. 글 하나로 끝내기에는 아쉽기도 하고,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서. 나와 같은 유사과학 신봉자들을 위해 가볍게 'MBTI 시리즈'를 적어보기로 했다. 지난 글은 아래 링크를 참조.
#1. ESTJ와 ENFP가 같이 출장을 가면
https://brunch.co.kr/@angiethinks/9
나는 어쩌다 보니 ENFP에 둘러싸인 삶을 살고 있다. 우선 집에는 모친이 계시고,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 C, 그리고 지난 글에서도 출연한 회사 후배 K가 모두 ENFP다. MBTI가 흥하기 전에는 이 셋을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시간을 들여 곱씹을수록 세 사람은 닮은 구석이 참 많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느꼈던, ESTJ가 바라본 ENFP 세 사람의 귀여운 습성을 적어보았다.
천장을 뚫는 리액션
주변에서 이렇게 리액션이 좋은 MBTI를 본 적이 없다. 웃긴 얘기를 해도 슬픈 얘기를 해도 반응이 남들의 오천 배는 되는 기분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한 번은 급히 119를 타고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는데, 가족들이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그야말로 후배 목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나왔다.
- 네에?! 응급실이요?! 흐이이이잌!!
정신이 없던 탓에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저런 느낌이었다. 물론 나름 심각한 일이었지만 뭐랄까.. 너무 아파서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 순간에도 그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픽 웃음이 났다. 지금도 가끔 그 날 얘기를 하는데, 후배는 너무 놀랐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억울해하지만 자꾸 놀리고 싶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ㅋㅋ)
친구 C도 마찬가지다. 마주 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노라면 표정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C 본인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극도로 공감을 할 때는 급정색을 한다. 그리고 위로하는 말을 할 때에는 눈썹이 축 처졌다가 건들건들 가볍게 (아마도 문제를 가볍게 여기길 바라는 마음인 듯) 말을 던진다. 그러다 신나는 얘기를 하면 갑자기 춤을 춘다. 특히 대화하다가 음식이 나오면 급격하게 행복해진다.
세상에 재미있는 일 하나 없네 싶다가도, 이런 ENFP와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든 게 다 시트콤의 에피소드처럼 느껴진다. ESTJ가 인류애를 상실한 채 로봇처럼 따박거려도 그런 엣티제의 코앞에서 인간미를 온몸으로 내뿜을 수 있는 MBTI가 바로 엔프피 아닐까?
푸념은 5초 컷
ENFP는 푸념을 할 때 그 이야기를 절대 긴 시간 늘어놓지 않는다. ESTJ인 나 같은 경우 문제가 생기면 그게 해결될 때까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인데, ENFP는 정말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울면서 힘든 얘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방영 중인 드라마 얘기와 오늘 먹은 것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곤 한다. 조금 과장이긴 해도 이 정도면 심적 5초 컷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루는 꽤 늦은 시각에 친구 C가 업무적인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ESTJ의 일적 오지랖ㅋ이 발동해서 (사실은 내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나는 C가 업무 할 때 필요한 이것저것들을 1p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같이 고민해줄 수 있는 분야이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친구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하우를 적어내려 갔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30 여분을 고민하며 문서를 완성해 왔을 때, C는 어느새 주제를 바꾸어 친구들과 다른 즐거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띠용스틴) 순간 혼자 과몰입한 내가 머쓱하기도 했고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니 이런 게 필요한 거 아니었냐고 하지만 그래도 쓴 건 잘 전달했다. 그리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나름대로의 조언도 덧붙여주었다. 그러자 바로 갠톡으로 기프티콘이 날아왔다. 참나 원 도통 종잡을 수가 없네 이 녀석..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학생 때 나의 MBTI는 놀랍게도 ENFJ였다. (그만큼 회사가 내 심장에 무리한 영향을 주었다는 뜻)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 스스로도 내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가기 시작했고, 바뀐 내 성격에 적응을 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하지만 내 주변에 ENFP들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가진 고유의 결과 성정은 어쩌면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풍파에 휩쓸려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단단한 뿌리보다는 이슬을 머금은 파릇파릇한 이파리 같은 ENFP. 그와 나눈 유쾌한 카톡 하나를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참나 원 도통 종잡을 수가 없네 이 녀석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