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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ie 앤지 Nov 17. 2021

#3. ENFP, ESTJ, ISFJ가 여행을 가면

파국의 엔프피와 엣티제 사이에 수호자 잇프제를 끼얹어보세요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동행인들은 평소 회사에서 친하게 지냈던 후배 둘. 세 살 터울씩의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잘 지내는 사이로 큰 걱정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또 어떤 대단한 여행기를 남기게 될지 궁금했을 뿐. ESTJ인 나와 ENFP인 후배 K는 이전의 출장으로 너무 다른 우리를 경험했기에, 중간에 낀 '용감한 수호자' ISFJ 후배 L이 어떻게든 우리를 조율해주겠거니 하는 기대를 했다.


(+) ENFP 후배와의 출장기를 먼저 읽고 싶다면? 

https://brunch.co.kr/magazine/mbti-essay






여행 계획을 짜긴 짰는데

여행 1주 전. 각자 가고 싶은 곳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이번 여행의 목적이 '힐링' 자체였기 때문에 최대한 계획을 짜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런 목표를 세운다는 것부터 ESTJ  인스타그램 지도 기능을 켜놓고, 대충 가고 싶은 곳을 몇 군데 저장했다. 맛집은 애들이 많이 찾아올 것 같아서 책방이나 소품샵 위주로.


엔프피 후배의 집에 모인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강유미의 MBTI 영상을 시청했다. 일종의 워밍업이었다. 정말이지 이 유사과학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팬데믹의 우리들은..! 어쨌든, 우리는 각자 가져온 것들을 펼쳐보았다.


(아래로는, 읽는 분들의 편의를 고려해 세 사람의 MBTI를 닉네임 대신 표기합니다.)


ESTJ: 8개 스폿. 숙소와 가까운 곳 몇 군데와 둘째 날의 동선을 고려한 몇 군데를 가져옴. 끝.

ISFJ: 39개의 스폿. 맛집, 카페, 관광지 등 다양한 종류. "제주"라는 타이틀로 지도 리스트 저장해옴.

ENFP: 여러 군데 정리를 해옴. 그런데.. 어디에 저장했는지 찾지 못함.


그랬다. ENFP 후배가 "아 어디에 저장했었지? 어디였지?"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아, 이 여행 정말 재미있겠구나.. 그리고 그녀는 1시간 뒤 본인이 저장한 메모를 찾았답니다.




선배님, 국내선이잖아요

대략적인 계획이 정리되고, '공항에서 몇 시에 만날지'를 정하기로 했다. 해외 출장 때 한 번 겪었던 논쟁(?)이기에 이는 우리 사이에 꽤나 중요한 이슈였다.


ENFP: 국내선인데 30분 전에 도착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ESTJ: 그래도 30분은 좀 불안하지 않아? 요즘 주말에는 늘 사람 많다던데.

ISFJ:  ^^..ㅎㅎ


그래서 우리는 1시간 전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독재자 아님. ISFJ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음 그리고 여행 당일, 오전에 나눈 우리의 카톡 일부를 공개한다.


누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대화.kakaotalk


그랬다. 나도 나름 J 81% 인간인데, ISFJ 후배는 대체 J가 몇 퍼센트길래 저렇게 부지런한 건지! 하지만 우리 중 가장 스스로 뿌듯해한 건 1시간이 넘게 일찍 도착한 엔프피였다는 거.




가방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2박 3일 여행, 신기하게도 셋이 들고 온 가방 사이즈가 모두 달랐다. ISFJ 후배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기내 반입이 여유롭게 가능한 사이즈의 캐리어를, ESTJ인 나는 기내 반입이 가능하지만 귀찮아서 부쳐버린 21인치의 캐리어를, ENFP 후배는 가장 큰 24인치의 캐리어를 들고왔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해 다 같이 가방을 열었을 때, 우리 셋은 다른 이유로 깜짝 놀라 서로에게 물었다.


ISFJ야, 이렇게 작은 가방에 그걸 어떻게 다 가져왔어?

잇프제에게는 없는 게 없었다. 조그마한 가방에 어쩜 그렇게 모든 걸 야무지게 싸왔는지! 볼캡이 젖을 수 있으니 두 개나 챙기고, 서핑 후 젖은 수영복을 담을 지퍼백도 챙겨 왔다. 카메라를 담는 가방도 따로 있었다. 심지어 일거리도 챙겨 왔다. (대체..)


ESTJ님, 이걸 어떻게 다 이렇게 정리해오셨어요?

후배들이 물었다. 사실 나는 엣티제치고 정리를 잘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래도 비상약이나 조미료 같은 건 꼼꼼하게 챙겼다. 동생들에게 야식을 직접 만들어주기로 했기에, 전 날 필요한 것들을 소분해 담고 혹시 몰라 배달음식에 딸려온 소스들도 가져왔다. (흠흠.)


ENFP야, 그 큰 가방에 대체 뭘 가져왔어?

엔프피에게는 없는 게 많았다. 큰 가방에 뭘 열심히 챙겨 오긴 했는데 폼클렌징도 없고, 아우터도 없고, 애플 워치 충전기도 없었다. 즉흥적으로 본가에 다녀오느라 그랬단다. 뭐, 하지만 괜찮았다. 왜냐면 J들이 다 가져왔거든. (후후)




내 계획이 무너지다니

둘째 날, 후배들은 서핑을 하러 가고 나는 독립서점을 들러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부지런하게 준비를 하던 찰나 갑자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아침 파도가 너무 잔잔해서 서핑하기가 어렵다고, 혹시 두 시간 뒤인 다음 타임에 오는 게 어떠냐는 내용이었다.


ISFJ: ...어떡하죠?


일단 전화를 끊은 잇프제 후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표정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나의 계획이 무너지다니..! 어젯밤 들떠서 아침-점심-해 질 무렵-저녁까지의 계획을 짜던 후배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저런. 같은 J로 너무 공감이 된 나는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ESTJ: 서핑하러 왔는데 파도가 없으면 안 되지. 나는 괜찮으니까 12시로 늦추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 또한 살짝 고민이 됐다. 아침부터 인기가 많은 빵집에 들러서 둘이 먹고 싶다고 한 빵을 사두고 여유롭게 독서를 하러 갈 계획이었는데. 하..


ENFP: 그럼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발랄한 엔프피의 말에 이끌려, 아침 댓바람부터 전복을 먹으러 간 우리들. 덕분에 우리는 전복 맛집을 단 5분 만에 입장할 수 있었고 서핑도, 독서도 무탈하게 즐겼다. 비자림으로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서야 잇프제 후배는 웃었다. 꽤 행복한 하루였죠? 계획대로 안 되어도 괜찮죠? 엔프피 후배의 말에 잇프제 후배가 격하게 공감하고, 나도 (겨우) 털어온 빵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 마지막 날

30분 여유롭게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에도 일찍 도착했다. 사건사고 하나 없이, 우리의 여행은 아주 스무스하게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J들은 그 점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역시, 계획대로 되고 있어..


ENFP: 왜 이렇게 무탈하지? 너무 이상해요..

ESTJ: 대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온 거니.

ISFJ: 대체 그동안 여행을 어떻게 다니셨던 거예요.


그러자 엔프피 후배는 그동안 다녔던 제주 여행에서 '안 뛰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저떻게 비행기도 잘 타고, 잘 해결했어요. 그 밝은 목소리에 우리는 또 웃었다. 이것저것 마지막 쇼핑을 하고 난 후, 최후의 승자는 바로 텅텅 빈 24인치 캐리어를 가지고 왔던 엔프피 후배였다. 그래.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유독 아쉬웠다. 제주도를 처음 간 것도 아닌데, 복작복작했던 며칠의 추억은 샛노란 귤처럼 예쁘게 여물어 가슴에 남았다. 우리 셋 모두 똑같은 크기의 가방을 가지고 왔더라면 덜 재미있었겠지. 몇 키로가 훅 늘어 무거워진 캐리어를 끌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다르니까 재미있었던 거야. 

그렇게 이 글을 적는 오늘도, 나는 유사과학을 신봉하고만다.



@angiethin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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