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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ie 앤지 Sep 13. 2020

#1. ESTJ와 ENFP가 같이 출장을 가면

이렇게나 다를 줄은 몰랐고, 또 이렇게나 좋을 줄도 몰랐던

작년 가을, 후배 K와 단 둘이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 엄격한 관리자(ESTJ)인 나와 재기 발랄한 활동가(ENFP)인 후배. MBTI 궁합 차트에서는 '파국' 조합이지만 우리는 지난 4년간 무탈하게, 너무도 잘 지내온 사이였다. 출장이라고 뭐 다를 거 있겠어?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극계획 인간인 나와 자유분방한 사고의 K. 생각하는 방식과 습관이 그야말로 극과 극의 대척점에 있던 우리의 출장기에 대해 적어본다.






가기 전부터

언어가 안 통하는 곳을 가게 된 우리. 나는 처음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구글 맵도 쓸 수가 없어서 현지 앱을 깔았지만 그것 또한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휴가를 갈 때도 플랜 A, 플랜 B까지 세워두는 나. 읽지도 말하지도 못하는데 어쩌지?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K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가면 다 잘 다니게 되어있어요!"


출발하는 날도 그랬다. 서로가 생각하는 '여유로운' 공항 도착 시간이 달랐다. 나는 시간이 남더라도 빨리 도착해서 모든 수속을 마치고 안에서 기다리는 타입이고, K는 불필요하게 일찍 도착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비행기를 타러 줄을 서는 타이밍도 차이가 났다. 비행기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 긴장이 풀리는 나와 기내는 갑갑하니까 굳이 일찍 보딩 하지 않는다는 K.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차이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짐을 풀 때도

나는 호텔 밖으로 나갈 때 무조건 캐리어를 잠근다. 걱정도 의심도 많은 타입이라 현금이나 여권, 서류 등 중요한 것 중 반은 캐리어에, 반은 내가 직접 들고 다닌다. (금고도 못 믿음) 본격적인 출장 첫날, 호텔을 나서기 전 K의 자유분방하게 열려있는 캐리어를 보고 나는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닫고 싶은데, 내 것도 아니고. 괜히 말하면 후배가 기분 나빠할 것 같고. 10분 정도 고민하던 나, 결심을 하고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혹시 그.. 내가 이 캐리어를 닫아도 괜찮겠니?"


내 말에 K는 엄청 큰소리로 웃었다. 저 진짜 아무 상관없는데, 이유가 뭔지 그것만 알려주세요. 나는 일단 빠르게 캐리어를 닫았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K에게 구구절절 이유를 말했다. 닫아도 괜찮은 거면 닫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굳이 열어놓고 나갈 필요는 없잖아. 오버해서 말하자면 깨진 유리창 이론 같은 거랄까.. 나의 아무 말에 K가 웃으면서 가방을 메었다. 교통카드 챙겼어? 나는 그 와중에도 다른 잔소리(?)를 하며 신발을 신었다.



메뉴를 고를 때, 그 외에도

호텔 식당이 레노베이션 중이라 브런치를 룸 서비스로 가져다준다고 했다. 종이에 메뉴를 체크해서 방 문에 걸어두면 되는 거였는데, 메뉴를 고르는 시간도 차이가 났다. 손이 가는 대로 큰 고민 없이 체크를 하는 K와 오늘은 이거 먹었으니까 내일은 이 조합으로 먹어야지. 근데 저건 뭐지? 현지식인가? 아 향신료 때문에 못 먹겠네.. 를 고민하며 최적의 메뉴 조합을 찾는 나. 앤지님 아직도 다 안 고르셨어요? 설마 지금 후기 찾아보시는 거예요? K가 나를 놀리는 투로 말했다. 아니야! 내가 발끈했고 K가 웃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서로의 행동과 습관에 놀랐다. 바우처나 기타 서류 등 모든 것의 사본을 챙겨가는 나. 길을 가면서도 즉흥적으로 동선을 짜는 K. 무엇이든 쉽게 도전하는 K와 작은 것에도 고민에 신중을 거듭하는 나.


"계획을 최대한 머릿속에 입력하고 다니지. 아 이번 주는 어떤 미팅이 있고, 다음 주에는 이 행사가 있고, 이번 달에는 약속 몇 개 있고.."

"피곤하시겠다. 그냥 닥쳐서 하면 되잖아요."

"그게 더 스트레스인 타입이라 어쩔 수 없어."

"사실 인생에 계획대로만 되는 게 없는데."

"그래서 계획을 하는 거 아니야..?"


이야기를 나눌수록 재미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이서 몇 년을 지냈는데, 이렇게나 다른 걸 몰랐다니.



잊지 못할 크림 브륄레 팬케이크

고된 일정 끝에 달달한 게 당겼던 우리는 쇼핑몰 지하 식품코너에 들렀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얹은 크림 브륄레 팬케이크 하나를 샀다. 호텔까지는 걸어서 10분이 좀 안 걸려서, 케이크는 도착해서 먹기로 했다.


"근데 저는 되게 편했어요. 앤지님이 이것저것 잘 챙겨주셔서."


K의 말이 고마웠다. 그래? 나는 내심 좋으면서 되물었다.


"제가 아 이거 어디 갔지? 하면 여기 있어, 하고. 아 이거 뭐였죠? 하면 이거야, 하고."


그러고 보니 그랬다. K가 툭 떨어뜨리고 간 걸 슬그머니 주워서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기도 하고. 혹시 모르니까, 하면서 필요할 만한 것들을 두어 개 더 챙겨두기도 하고. 반면 K는 극계획충인 나를 프로 보필러처럼 챙겼다. '제가 그냥 가서 물어볼게요!' 하고 손을 들고 씩씩하게 현지인에게 달려가기도 하고, 다 잘 될 거라며 나를 다독이기도 했다.


"케이크 한 입만 먹을까?"


우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스푼을 들었다. 꺄악 너무 맛있어요! 상해의 어느 골목에 K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순간을 브이로그로 남기겠다며 그 모습을 찍던 나도 웃음이 터졌다. 고생 끝에 먹는 케이크는 정말로 달콤했다. 쫄보에 걱정덩어리인 나와 조금 즉흥적이어도 씩씩 대장인 K..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돌아가는 거구나. 놀라울 정도로 너무 달라도, 결국은 서로를 보완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거구나.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너랑 여행가도 될 것 같아."


내가 K에게 말했다. 와 저 합격한 거예요? K가 그 말을 받아치면서 웃었다. 그때 느꼈다. 독불장군에 고집도 센 내가,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고. ESTJ고 ENFP고, 파국이고 최악이고. 결국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동료든 친구든 가족이든, 모든 관계의 시작은 서로에 대한 인정 그리고 애정이라는 걸.



이 글을 저의 하나뿐인 소중한 후배 K에게 바칩니다.



@angiethin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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