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으로 낯설고 난해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지난 일요일,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의 총막공을 보고 왔다. 올해 국내 초연을 올린 그레이트 코멧, 나의 관람 횟수는 3회. 세 번째 관극에야 자셋 매직을 완벽하게 경험하고 사랑에 빠진 극. 실험적이고 독특한 구성과 연출, 그래서 더 위대하고 찬란했던 대혜성. 그레이트 코멧의 개인적인 감상기를 적어본다.
첫인상
첫 번째 관극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뭐 이런 공연이 다 있지? 친구를 데리고 온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19세기 러시아라는 배경, 공연 시작 5분 전부터 관객석으로 침투하는 앙상블, '노잼', '1일 1팩' 등 괴이한 번역, 난해한 장면과 지나치게 독특한 일부 넘버들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맞춰 달리고 노래하는 배우들은 잔뜩 신나 보이는데 같이 신나야 할 이유를 마지막까지 전혀 찾지 못했다.
서사도 마찬가지였다. 음악과 가사는 차치하고, 마지막에 피에르가 왜 나타샤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낀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주인공의 이야기니 가장 중요해 보이긴 했다만)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머리가 아팠다. 심지어 제작사가 첫공 당일 무대와 가까운 일부 좌석을 취소시키는 역대급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관객으로서 기분도 상한 상태였다.
나는 후기를 몇 개 더 읽어보기도 전에 잡아두었던 자둘, 자셋 티켓 두 장을 과감하게 취소했다. 일단 이 공연은 어느 정도 무르익을 때까지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게 그레이트 코멧의 첫인상은 '매우 불친절한 극' 그 자체였다.
두 번째 도전
그 후로 한 달 동안 나는 다른 공연에 매진했다. 그 와중에 코멧의 넘버 몇 개가 간간이 떠올라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래, 한 번 다시 믿어볼까. 두 번째는 좀 낫지 않겠어? 고민 끝에 자둘매직을 믿고 갔던 두 번째 관극. 하지만.. 자둘매직은 쉽게 오지 않았다. 배우들과의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시국이 시국인 탓에 더욱이 어색했고, 볼콘스키 공작과 마리가 등장하는 넘버부터 오페라 씬까지 불편함은 극에 달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지만 그 궁상맞은 캐릭터와 의도된 불협화음, 기괴한 보컬이 유발하는 스트레스는 견디기 힘들었다) 아나톨의 화려한 등장에 잠시 정신이 팔렸지만, 클럽 씬에서 이내 다시 심신이 불안해졌다. 내가 왜 이걸 또 보러 왔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지막 씬. 피에르의 마지막 넘버를 보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이걸 보려고 여기 다시 왔구나!
마지막 넘버의 타이틀은 'The Great Comet of 1812'. 영혼을 감싸주는 듯한 홍광호 배우와 앙상블의 노랫소리. 그와 함께 천장에 설치된 동그란 원 모양의 구조물을 따라 조명이 혜성처럼 궤도를 그리며 켜지는데..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다. 아니, 뭐가 난다고? 극 하나를 보고 이렇게 감정이 이리저리 널뛸 수가 있다니. 그것도 호불호의 영역을 이랬다 저랬다 오가면서. 지금까지 뮤지컬을 못해도 백 번 이상은 봤을 텐데, 생전 처음 겪은 일이었다. 정말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공연이었고 역대급으로 이상하고 난해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난해함이 80%, 아름다움이 20% 였지만.
그리고 마지막 만남
한 달이 흘러 그레이트 코멧의 마지막 공연일이 되었다. 운이 좋게 총막공의 표를 예매했지만 솔직히 감상이 바뀔 거라는 큰 기대는 없었다. 어떻게 코멧까지 사랑하겠어 그냥 본진을 사랑하는 거지 그래도 마지막 공연이니 조금의 용기는 내자고 다짐을 하고 공연장으로 향하긴 했다. 노래도 어느 정도 귀에 익었겠다, 대강의 스토리 흐름도 알고 있으니 그냥 한 번 몸을 맡겨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배우들에게 먼저 손인사도 열심히 하고 손뽀뽀받으면 같이 손뽀뽀도 돌려주고 (핵인싸 관극러인 척) 막공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면서 막이 올랐다.
세 번의 관극 중 가장 앞자리에 앉게 된 건 정말 행운이었다.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와, 로빙 뮤지션들 개개인의 땀방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마지막 공연이라 그런지 모두들 음정 한 음 한 음, 표정연기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보였다. 슬프고 화가 나는, 행복하고 기쁜 감정을 몇 배로 쏟아내는 배우들을 보고 있노라니 장인정신마저 느껴졌다.
첫공에 비하면 그야말로 비약적인 변화였다. 자잘한 실수는 있었지만 모두의 '합'이 완벽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극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언제 어디서 박수를 쳐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칼 박수의 희열) 첫공 때는 그렇게 난해했던 클럽 씬도 짧게만 느껴졌고, 레터스의 귀염뽀짝한 손 안무를 신나게 따라 하고, 발라가에서는 모두가 그야말로 정신을 놓고 달렸다. 유니버설 클럽 개장
잠시만, 이 공연이 원래 이렇게 재미있었나? 나는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마치 아나톨에게 급격하게 빠져버린 나타샤처럼. 그런 마음이 들자마자 갑자기 시간이 가는 게 너무도 아쉽기 시작했다. 이제야 그레이트 코멧의 정수를 알았는데.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라니!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무대 인사 타임이 되어 배우들과 김문정 음악 감독님의 소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한 배우님이 악기를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데.. 그 순간 나는 깨달아버린 것이다.
아, 나 코멧 사랑하네..?
대혜성의 의미
조금 많이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마지막 공연에서야말로 나는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을 만든 사람들이 왜 이 어려운 도전을 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답을 발견했다. 아니 그 답을 모두가 내 눈 앞에 보여준 것만 같았다. 배우들 대부분이 노래와 악기 연주를 병행하고, 관객석과의 경계가 허물어진 세트를 뛰어다니며 연기하고, 그 모든 것을 완벽한 합을 맞춰 올려내는 것. 그것은 그야말로 대혜성의 기적에 가까운 위대한 도전이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런 이머시브 공연을 올리겠다는 용기는 어쩌면 사명감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감히 생각해보았다.
마지막 소감 중 류수화 배우님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자기 자리에서 빛을 내주었기 때문에 하나의 그레이트 코멧이 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여러분도 그의 일부라고. 하늘의 별도 별 하나가 아닌 무리를 보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거라던, 마지막에야 알게 된 그레이트 코멧의 의미. 나는 그저 공연을 몇 번 본 관객 중 한 명일 뿐이지만, 이 극에 대한 나의 감상(의 변화기)은 개인적으로도 쏟아지던 대혜성처럼 평생 잊지 못할 듯하다.
늦게나마 사랑하게 된 그레이트 코멧,
이젠 안녕히, 안녕, 안녕.
☄️
(+)
막공 후 애플 워치를 보고 놀랐던 점 하나. 세 시간 동안 공연을 본 것뿐인데 얼마나 움직이고 신나게 박수를 쳐댔으면 운동 20분이 추가로 기록되어있었다. 나 참 끝까지 이런 공연은 또 처음이었네 운동까지 시켜주고 말이야..
홍광호, 박강현, 정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