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라, <영화에서처럼>(1996)
아침 여덟 시쯤이 되면 밝아지는 눈으로 몸을 일으킨다. 탁한 방의 문을 열고 어스름한 복도를 한번 보며 욕실로 들어가 양치를 한다. 지난여름부터 거의 매일 두어 번씩 가족들의 커피를 내리고 있다.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전자저울계의 영점을 맞추면 평범한 하루의 아침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아침을 쉼으로 보낸 지 일 년이 넘었다. 휴일이 주말뿐이던 지난 몇 달도 오후에만 출근을 했었기에 햇살과 함께 눈을 뜨는 난 매번 아침을 채워야 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화요일은 침대를 뿌리치고 책상 앞에 앉은 간만의 휴일이다. 창문을 열고 이부자리를 정리한 후, 널찍한 책상을 뒤덮은 세탁물들을 치우고 음악을 준비한다.
30년쯤 전, 어머니가 직접 구매하신 가수 '이소라'의 2집 음반을 꺼내왔다. 내가 '이 음반의 제철은 겨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을 증명하듯 '이소라'의 2집 음반은 1996년 12월 1일에 세상으로 나왔다. 이미 계절은 봄을 향해 달려가지만 일주일 간 앓은 내 몸은 아직 겨울을 품고 있는지 자꾸만 이 음반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겨울이 아주 가기 전 붙잡고 싶은, 겨울의 쉼을 담은 음반, '이소라'의 <영화에서처럼>을 고전 전람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까지가 지난겨울 끝의 글; 다가오는 이른 겨울 내음 앞에서 다시 마저 적는다.
이 음반은 국민 대부분이 아는 '이소라'의 대표곡, '청혼'이 담겨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보사노바풍의 리듬감 있는 멜로디를 가진 '청혼'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이 음반의 전체적 분위기를 밝은 쪽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그와 반전되게 음반의 분위기는 그림자의 이미지를 많이 띈다. 오히려 '청혼'의 바로 다음 곡으로 '화'라는 하드락 기반의 노래가 진행되기도 하고 또다시 귀가 편안한 재즈 결의 이지리스닝 음악으로 곧장 연결되기도 하면서 다면적인 가수의 기술을 뽐낸다.
이 음반을 언제 찾아 듣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려서부터 듣던 '이소라'의 음악의 깊이를 느끼고 싶었겠지. 첫 곡으로 담긴 '쉼'이라는 곡은 음반을 찾아보면서 처음 접하게 된 곡이다. 그 곡 중 나른한 목소리로 "누가 내게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지" 되묻는듯한 노랫말은 왜인지 프랑스 작가 사강과 그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내 갈 길은 내 마음대로 갈 수도 있지
늘 그렇듯 다들 그냥 따라가는 동안
세상을 나아지거나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시간은 독한 술로도 멈출 수 없어
마음대로 날 수 없다면 머물지 마
기나긴 여행이지만, 원치 않는다면
긴 한숨 속에 잠들어봐
긴 한숨 속에 잠들어봐...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날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프랑수아즈 사강의 인생과 그의 글처럼 담담하고도 반골적인, 책임을 느끼며 자조적이지만 그로써 느끼게 되는 피로를 미적으로 묘사하는 선율이 서로 참 닮아있다는 감명을 받았다.
나는 이소라라는 가수를 퍽 사랑한다. 이는 애정을 단언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나조차도 당당히 말할 수 있게 하는 노랫말 덕분이다. '청혼'이라는 가사 속 "그대에게 나 반한 것 같아, 말한 뒤에라도 후회하지 않을게요" 문장에 나는 같은 답을 주고 싶다. 그 말을 하는 당신에게 나 반한 것 같다고, 그리고 이 감정과 이 표현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이 음반은 겨울의 쉼 중의 안정과 방황을 모두 담았다. 그를 겪고 있는 사람들과 그 주변인들의 괴로움과 고뇌 혹은 냉랭해진 마음, 이 모든 걸 껴안는 감정들까지... 내 주변 대학 휴학 중인 친구들을 보면 그토록 바라왔던 '쉼'임에도, 그 안에서 방황의 생활을 보내고 또 그럼에도 안정을 느끼는- 이상한 무소속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난 그 생활에 익숙해져 신물이 난다면- 혹은 아직 내딛지 않은 것들이 두려워진다면- 다르고도 같은 시야의 화자 이야기처럼 이 음반에 녹아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필자가 이 음반을 고전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기나긴 시간을 앞두고 쉼을 선택한 당신의 삶 속, 비슷하지만 다른 이의 시선을 노랫말을 통해 엿보며 새롭게 풀어나갈 생활 지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