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 다시 1일

by 신지명

17호 차의 차장들은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낮 시간 동안에 흥겨운 음악을 틀어 주었다. 단 한 장의 CD뿐인 듯 가사가 외워질 정도로 음악이 무한 반복되었다. 그래도 뭔가 흥이 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시끄럽던 무리들은 모두 어디선가 스키를 즐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시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낮 시간에도 그들은 카드 게임을 하며 떠들썩했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었으며 멀쩡한 빈자리를 두고는 남녀가 포개 앉아 노닥거렸다.
이들이 내린 '크라스노야르스크 krasnoyarsk'라는 곳은 서울만 한 크기의 도시 같았다. 그동안 보아온 허름한 나무집이나 연기가 솟아오르는 굴뚝, 장작이 높게 쌓인 울타리 등이 전형적이었던 마을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석조건물들이 즐비했고 한강에 준하는 넓은 강 위로 물류를 싣고 나르는 배들도 제법 떠 있었다. 도로는 정비되어있고 기다란 가스관으로 추정되는 설비가 눈에 띄었다. 오래도록 황량한 벌판에서 추위만 겨우 견딜 것 같은 마을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잔한 마음에 푹 빠져있었던 탓인지 영어를 조금 하고, 스키를 즐기러 먼 곳까지 여행을 다니는, 가방 가득 풍성한 먹거리를 잔뜩 꾸려 넣은 이들 무리의 세속적인 모습이 어딘지 낯설게 느껴졌다.



떠들썩한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고작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그들은 처음과 같이 활기찬 모습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기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남겨둔 자리는 한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또 다른 군인 무리로 채워졌다. 앞서 만난 나이 어린 신병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나이도 좀 있어 보였고 복장도 자유로웠다. 그들은 핸드폰도 자유롭게 사용했고, 카드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군용 식량을 먹지도 않았다. 그 무리들은 우리를 경계하기는커녕 내 앞에서 바지를 훌렁 벗어 옷을 갈아입기도 서슴지 않을 만큼 낯선 눈빛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과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고 나니 그나마 초콜릿이며 젤리 따위를 나눠주던 앞선 무리가 그리워졌다.
낯설다는 느낌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환경을 만나는 순간 이전의 모든 것은 익숙한 것이 되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순간순간 새로움으로 향해가는 여행 안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지만 동시에 그리움이 되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인 모양이다.

늦은 밤, 풍경이 사라진 밤의 정적을 달래려고 영화 볼 채비를 했다. 주성치의 '서유기'를 보고 있자니 우리를 둘러싼 군인들이 창문에 비친 영화의 장면, 장면을 흘끗거리는게 느껴졌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내일쯤 우리는 서로의 공기에 익숙해져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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