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류단카와 바이칼
기차의 흔들림이 없어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꿈을 꾸다가 잠을 깼다. 남편은 진작 눈을 뜨고 일출을 보러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고 싶었으나 바이칼 호수에서 올라오는 일출을 볼 수 있는 딱 하루의 기회를 놓치기는 아깝다는 생각에 나도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복을 있는 대로 껴입고 이곳에서의 하루를 위해 한사코 챙겨온 두터운 패딩을 꺼내 걸치고는 방을 나섰다.
'슬류단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마을에 머물기로 결정한 이유는 역에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바이칼 호수가 있다는 글을 얼핏 본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 모두가 바이칼을 보러 가는 이르크추크니 알혼섬이니는...분명 원래의 파란 바이칼을 보여주기 어려울 테고 그것을 볼 것이 아니라면 차를 타고 배를 타서 호수를 건너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것이 아무래도 낭비일 것 같았다.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내 골치를 썩이던 그 경로를 과감하게 버리고 우연히 알게 된 슬류단카로 탕! 탕! 결정을 내린 것은 아무래도 잘 한 일이었다. 숙소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꽁꽁 얼지 않았다면 녹아내린 눈과 흙이 뒤엉켜 진창이었을 마을 길을 따라 잠깐 걸으니 호수는 호수가 아닌 것처럼, 마치 끝없는 평원인 것처럼 단단히 얼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행여 갈라져 빠지면 어쩌나 걱정을 '잠시' 하긴 했지만 어지럽게 나 있는 자동차 바큇자국을 보니 그것이 얼마나 애송이 같은 걱정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우리는 조금 더, 조금 더 호수 안쪽으로 걸어들어가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았다.
이제 막 시작된 어둠과 빛의 교대식은 도저히 '색'을 명명할 수 없는, 그저 '빛의 향연'이라고, 진부하지만 가장 명확한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황홀한 풍경이었다. 하늘의 빛을 받아 호수 위의 얼음 알갱이가 물결이 일듯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지평선에 솟은 나지막한 산줄기의 능선도 어둠이 지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늘과 태양, 바이칼 호수... 그들만의 위대하고 거룩하기까지 한 의식에 유일한 참관자로 자리를 허락받은 것이 영광스러울 따름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그곳을 벗어날 수 없어 한참을 서성였다. 결국은 마을 깊숙한 곳까지 빛이 스며들고 나서야 우리도 발 길을 돌릴 수 있었다. 해가 지는 그때 다시 한 번 들르자고 다짐을 하고는..
우리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가방을 꾸렸다. 직원이 신신당부한 '우뜨라 제싯, 아침 10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업무를 매뉴얼에 따르는 이들의 엄격함 덕에 280 루블을 더 지불하곤 가방을 맡겼다. 우리나라였다면 하룻밤 머문 정을 생각해서 공짜로 맡아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나마도 돈이 아까워 큰 가방 두 개만 맡기고 나머지는 어떻게든 이고 지고 마을 구경에 나섰다. 구경에 앞서 '거주자 등록'이라는 큰 숙제부터 해결해야 했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 입국 7일 이내'에 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처럼 떠돌아다니는 경우엔 도통 어찌 되는 것인지가 분명치가 않다. 누구는 필요 없다고 하고 누구는 해야 한다며 의견이 분분했다. 참고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너무 적었다. 게다가 보통은 관광지의 숙소에서 대행을 해주기 마련인데 영어도 통하지 않고 이방인이 낯설기만 한 이 작은 마을에서 그런 것을 해줄 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여기서 그게 되겠나'.. 싶은 심정과 '어디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을 모두 품은 채 무작정 우체국부터 찾아 나섰다. 역시나.. 우리는 우체국, 경찰서, 'passport store'라는 곳으로 뺑뺑이 돌려졌다. 어렵게 인터넷에서 본 거주자 등록증 양식이 놓인 'passport store' 사무실에 들어섰지만 씨알도 안 먹히게 불친절하고 신경질적인 아줌마가 안경 너머로 'visa'만 외쳐대는 통에 우리의 절망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러시아어로 된 '무비자 협정 체결 협약서' 사본을 들이밀며 우리는 visa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해보았으나 그녀는 또다시 'baikalsk!'라는 단어를 소리 지르고는 귀찮고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자신의 일로 관심을 돌렸다. 번역기를 열심히 돌려 그럼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적어 달라고 사정하듯 묻자 뭔가를 메모지에 갈겨 적어 넘겨주기는 하였으나 도저히.. 또박또박 다시 적어달라고 할 염치가 없어 무용지물인 그것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가 말한 baikalsk라는 그곳은 슬류단카에서도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라 어차피 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문 밖에는 야속하게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처음 겪은 좌절과 불쾌함과 서러움이 내 마음속에도 차갑게 휘몰아쳤다.
뭐... 안 되는 일을 어찌할 수 없고, 우린 최선을 다 했고, 다행히 휴일을 빼면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날이 7일 째이니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도전해보기로 하고 일단 접기로 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니 눈 내리는 마을이 낭만적인 감성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정비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세워진 건물들이 규칙 없이 아무 곳에나 나 있는 도로가에 세워져 있었다. 땅은 넓고도 넓으니 짓고 싶은 대로 지어도 무방할 것 같긴 했다. 그 와중에 3D 영화관도 있고 꽁꽁 얼어붙은 분수대며 단상이 있는 공원도 지나갈 수 있었다. 마을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곳엔 컨테이너로 된 가게 몇 개와 이상하게 얽힌 골목골목의 가판대에 눈이 소복이 쌓인 옷가지와 신발 등이 놓여 있었다. 큰 길 쪽엔 온몸을 허술하게 감싼 노파들이 병에 든 절인 채소와 마늘, 심지어 솔방울 몇 개를 올려놓은 리어카 곁에 무기력하게 앉아 눈을 맞고 있었다.
복합상가쯤으로 여겨지는 건물 안에는 빵이나 파스타를 파는 가게, 정육점, 말린 생선 따위를 파는 생선가게와 잡화점이 전부였다. 우리는 빵 가게에 들러 한 덩어리에 불과 13~14 루블, 삼백 원도 채 되지 않는 빵을 두 덩어리 사들고 나왔다. 어릴 적 만화에서 본, 줄이 세 개 그어진, 툭 부러뜨리면 동그란 빵 덩어리가 떨어지며 동강이 나는 그 빵처럼 생긴 것이었다. 만화에서의 느낌은 좀 더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었지만 실제는 질깃질깃한 바게트 빵의 느낌이라는 것이 안타깝긴 했다.
바이칼 특산물이라는 '오믈'은 조리가 필요한 상태로만 판매를 하는 통에 살 수는 없었다. 생선이면 뭐든 사랑하는 남편이 무척 아쉬워하는 눈치이기는 하였으나 비린 것은 딱 질색인 나는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발길을 서둘러 옮겼다. 행여나 남편이 마음을 바꿔 생물이라도 사자고 나설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내가 먹을 것도 아니면서 괜히 송신한 까닭이었다.
생각보다 마을이 작기도 하였고 남편이 맨 가방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던 탓에 다시 역으로 돌아와 언 몸을 좀 녹였다. 눈발은 거세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할 뿐 멈출 것 같지는 않았다. 몸을 좀 쉰 우리는 눈이 내리는 바이칼이 궁금하여 아침의 그 길로 다시 나섰다.
눈바람에 있는 대로 숙여졌던 고개를 들고 호수에 내려섰다.
'이건.... 이건.... 뭐지?.....'
아침의 그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완전히 다른 풍경이 눈앞에 놓여있었다. 하늘도, 호수도 하나의 색으로 경계가 희미해져 버렸고, 그 자리에 있음이 분명한 산은 눈보라 저편에 완전히 가려져 버렸다. 우리가 걸어온 마을 쪽을 제외하고는 온통 '하나의 공간'만 존재하고 있었다. 지구라기보다, 가본 적은 없으나, 우주의 어느 행성엔가로 이동해버린 것처럼 낯선 공간감이 몸을 감쌌다. 내 몸에 닿는 눈바람 소리가 아니었다면 내 몸 조차도 하얗게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뻔했다. 실제로 내 머릿속은 어떤 잡념도 감상도 없이 '무'의 상태에 잠시 머물러 풍경 속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곳에선 감탄의 소리도 너무나 클 것 같았다.
낯선 그 공간에 익숙해질 때쯤, 저 멀리, 수평선으로 추정되는 곳에 사람 형태의 점이 몇 개 나타난 것을 보고 우리도 조금 더 걸어 들어갈 용기를 얻었다. 그 점으로 보이던 사람들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가까워지는 것인지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 원근감을 잃어 한참을 지켜봐야 했다. 우리의 눈앞까지 걸어온 그들은 놀랍게도 배낭을 멘 여행객들이었다. 호수 저편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걸어온 것이 분명한 차림새였는데 세 명 중 한 명은 온전한 등산용 스틱을, 두 명은 스틱의 흉내를 내는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경이로움과 이 어마어마한 풍경 속에 함께 발을 딛고 있다는 동질감에 못 이겨 격렬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더니 그들이 기꺼이 받아주고는 우리의 곁을 지나쳤다. 어디서부터 걸어온 것일까? 방향을 보면 아침에 보였던, 지금은 사라진, 그 산 아래 마을뿐인데... 이 눈보라 속에서 걸어올 만한 거리는 분명 아닌 것 같았는데.. 여하튼 우리는 호기심을 잠시 미루고 온통 하얀 공간에 조금 더 머물렀다. 얼어붙은 얼굴이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우리의 궁금증은 역 내로 다시 돌아온 후에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한 명 두 명, 모자의 한 쪽 면에만 눈이 잔뜩 엉겨 붙은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5~60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조용했던 대합실을 가득 채웠다. 우리가 호수에 조금 더 있었더라면 하얀 미지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창조되듯 툭툭 튀어나오는 장관을 볼 수 있었겠다 싶었다. 이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빽빽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젖은 옷을 처리하고 음식을 꺼내 먹은 후에 다시 모여 사진을 찍고, '수료증'과 같은 것을 나눠주며 서로서로를 축하해주었다. 우리는 굳이 자리를 뜨지 않고 이들의 한가운데에 앉아 마치 일행인 것처럼 함께 박수를 쳐주고 사진을 찍었다. 얼어붙은 바이칼의 풍경이 인쇄된 수료증을 보니 무슨 '바이칼 횡단 대장정'같은 행사를 한 모양이었다. 어린아이부터, 청년, 부모들로 연령과 성별이 다양한 것을 보니 한마을 또는 우리네 본당 행사처럼 하나의 공동체에서 행사를 치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우리의 고향 같은 '마두동' 식구들이 그리워졌다.
그들 덕에 기나긴 대기시간은 한결 빠르게 흘러갔다.
21시 41분.
단 하루의 만남이었지만 바이칼 호수는 엄청난 무게감으로 마음에 남았다. '공간의 무게'가 주는 신비로움이 쉽게 잊힐 것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차가운 눈바람이 시야를 가리는 통에 기차 밖으로 튕겨져 나온 그 밤처럼 우리는 다시 기차의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이번 열차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고 매우 시끌벅적하기까지 했다. 테이블 자리에 10명도 넘는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끼여앉아 와글와글 떠들었고 우리의 침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두 쌍의 남녀도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웃고 떠들며 뭔가를 먹어댔다.
우리는 두 번 째랍시고 매우 빠르게 물건들을 제자리에 위치시키고 시트를 씌워 잠자리를 마련했다. 음식 외에는 소지품이 별로 없는 이들에게 우리의 잡다한 물건들이 신기했는지 남편의 윗자리에 누워있던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재밌다는 듯이 휘 둘러보고는 흐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우리 침대를 차지하고 앉은 언니들은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지 우리에게 말을 걸곤 이것저것 물었다. 일단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난 뒤에 나는 언니의 손에 들린 '오믈'임이 분명한 생선을 가리키며 '이거 오물이야? 순진한 척 물었다. 남편을 위해 한 점 맛이라도 보게 해줄까 싶은 마음에 한껏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 본 것이었다. 나의 작전이 적중하여 그 언니의 남자친구는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믈의 껍질을 벗기고 휴지에 곱게 싸서는 반 마리씩 선뜻 내밀어 주었다. 그의 센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민물 연어라곤 하였지만 크기는 조기만 하고 꾸덕꾸덕하게 말린 것이 과메기 같은 질감을 한 오믈은...내가 생각한 그 맛이었고 남편이 그리던 그 맛이었다. 나는 그들의 성의가 민망하지 않게 눈을 크게 뜨고 맛있다며 엄지를 추켜세워주었지만 사실 숨도 못 쉬고 삼키지도 못한 채 우물거리기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은 우리의 식량 상자에서 보드카를 꺼내 한 모금 마시고는 그 참에 꿀꺽 삼켜버렸다. 어? 그런데 이것이 신기하게 보드카와 먹으니 비린 맛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 덕에 몇 입 더 먹는 시늉을 할 수는 있었지만 덩달아 보드카의 술기운도 오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며칠 동안 굶주린 채 눈밭을 헤매다 처음 음식을 맛본 사람처럼 허겁지겁 오믈을 뜯어먹더니 어느새 꼬리만 손에 쥐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내 오믈을 건네주고는 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시어머니가 싸주신 멸치볶음을 선보이며 그들의 관심을 돌렸다. 한 언니가 무척 관심을 보이며 좋아하였다. 우리는 이것이 맥주와 잘 어울린다며 다음 역에서 맥주를 살 수 있을지를 물었다. 보드카는 이미... 빈 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니들은 비관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경찰들이 종종 다니므로 맥주를 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에?! 그럼 당신들이 마시고 있는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0'이라고 크게 쓰인 무알코올 맥주였다! 그래서 우리가 보드카를 꺼내 벌컥거릴 때 '보드카?!'라고 놀라며 웃었던 거였구나... 남편은 이마를 탁 치고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그들에게 입단속을 간청했다.
추위와 피곤이 보드카에 녹아내려 노곤해진 남편은 순식간에 곯아떨어졌고 남편이 미쳐 챙겨 넣지 못한 카메라 등을 내 베개 밑으로 쑤셔 넣고는 나도 잠을 청했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의 시간이 어느새 슬류단카와 바이칼의 고요함을 저만치 추억으로 밀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