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슬류단카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심장이 살짝 조이기 시작했다. 3일간의 보금자리를 털고 슬류단카 slyudyanka에 내릴 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차역 안에 숙소가 있다는 글을 분명 어디선가 보기는 했는데 이곳에 들른 한국인이 워낙 없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정보를 찾지 못한 터였다. 며칠 동안 각자 자리를 잡고 우리의 세간이 되었던 물건들을 다시 모아 가방을 꾸리고 째깍째깍... 긴장되는 시간을 보냈다. 22시 35분. 남편과 나는 2분의 짧은 정차시간에 쫓겨 기차에서 튕겨져 나오듯 어두운 플랫폼에 덩그러니 남겨지고 기차는 떠났다.
전혀 도시일리가 없는 작은 마을에는 불빛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갈 수 있는 길은 수많은 계단이 놓인 육교뿐이었다.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거친 숨소리만 뿜어내며 육교를 건너왔다. 문 닫힌 컨테이너 상점이 몇 개 늘어서 있었는데 '오믈'로 추정되는 생선 모양의 커다란 간판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어서 와. 바이칼은 처음이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조금 더 걸으니 멋을 낸 벽돌 건물의 커다란 창문에서 따뜻해 보이는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역시 커다란 나무 문을 무겁게 당기고 들어서니 직원 한 명과 역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려는 할아버지 한 분만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의 움직임을 쫓았다. 일단 무거운 가방들을 의자에 던져 놓고는 조금 더 안쪽으로, 숙소처럼 보이는 무엇인가가 있기를 기대하며 찾아 들어갔다.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고 자는 시늉을 했더니 한 창구를 가리켰다. 나의 몸짓을 터무니없어하지 않는 것을 보니 숙소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창구를 지키고 있던 나이 든 여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러시아 말을 뱉어냈다. 내가 무어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있으니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또 러시아 말을 쏟아냈다...
서로 알 수 없는 질문과 말을 주고받은지 한참만에 같은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숙소에 머무를 시간! 영어는 숫자도 안 통하는 통에 나는 수첩을 뜯어 막대 사람을 두 명 그리고 지금의 시간과 아침의 시간을 적어 '11'이라고 적어 내밀었다. 숙소는 시간당 55 루블, 이천 원 정도였다. 거기에 인당 100 루블의 알 수 없는 금액 -보증금쯤 되려나-이 더해져 1,410 루블로 우리는 어둠과 추위 속으로 내몰리지 않아도 되었다. 금액을 치르고 나서도 직원은 우리의 여권을 한참이나 주물럭거렸다. 이름이 무엇인지 찾는 것 같아 알려주었으나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다. 나중에 사인을 하라고 내민 장부에 적힌 엉터리 이름을 보니 알파벳이 아닌 키릴어로, 소리 나는 대로 이름을 적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삼십 분이 넘게 모든 절차를 통과하고 나서야 커다란 나무 문 뒤편의 초록색 불이 가득한 음산한 복도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방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라디에이터의 훈훈한 기운과 높은 천장에서부터 드리워진 금색의 커튼이 어우러져 따뜻함을 주기 충분했다. 여직원은 여전히 러시아 말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는데 뭐.. 몸짓을 보니 방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꼭 알아듣기를 바라는 단호한 눈빛으로 '우뜨라', '제싯'을 여러 차례 말했는데 나는 따라 말한다고 뜻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니면서 함께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직원의 알 수 없는 손짓과 '우뜨라'에 집중을 하다 보니 '아침'을 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morning?'하고 되물으니 그제야 '바로 그거야!' 하는 눈빛과 함께 검지로 나를 콕 찍어 가리켰다. 그녀는 드디어 우리를 이해시킨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알고 있다고요... 아침 열 시... 딱 그만큼이라고요.. 11시간.
직원이 방문을 닫고 나간 후에야 우리도 큰 고비를 넘긴 것에 마음껏 안도했다. 3일간 보기 좋게 떡진 머리를 감을 수 있음에 감사했고 남편이 끓여 준 사리곰탕 죽과 보드카 한 모금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