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한테 그다지 관심이 없는 군인들 덕에 조용한 여행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오산이었다. 물을 뜨러 간 남편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빼고 통로를 건너다보니 낯선 자리에 앉아 웃고 있었다.
남편을 붙잡아두었다가 급기야 그 뒤를 따라 우리 자리로 다가온 '키리을'은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나 집요했기 때문이었다. 기차가 이동하는 중에는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아 번역기가 먹통이어서 대화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하고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질문은 우리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러시아 군인이 어떠냐,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무섭지는 않느냐,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을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따위였다.
키리을이 물꼬를 트니 우리 건너편 자리의 녀석들, 서유기를 보고 키득거렸던, 그들도 덩달아 몇 마디를 건네며 인사를 나눴다. 역시 영어로는 긴 대화가 어려워 대화거리 삼아 그들의 이름을 한글로 써주니 다들 박장대소했다. 이게 무슨 글자냐는 듯이 무릎을 치며 웃었다. 나도 키릴 문자를 처음 봤을 때 딱 그런 느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기차가 작은 역에 정차했다. 남편이 키리을과 담배를 함께 피우러 나갔다가 담배를 교환해 왔다. 거기까지였었더라면 키리을은 좋은 인연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우리 자리로 따라들어온 그는 갑자기 자신의 시계를 손목에서 풀어 주더니 남편의 시계를 가리키며 교환하자고 나섰다. 그 시계는 내가 무려 3년치 생일선물로 거금을 들여 사준 전자시계였다. 남편이 황급히 '아내가 사준 생일선물'이라서 안된다고 거절했지만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 정도의 값어치를 하는 다른 무언가를 계속 요구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으니 소중한 물건을 교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가방을 뒤적거리며 고민하는 척을 했지만 사실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념품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고 혹시나 하여 챙겨온 난이 그려진 부채를 꺼내 보여주니 자기네도 그런 것은 많다고 거절했다. 나는 가진 것이 옷이며 먹을 것뿐이고 특별한 것이 없다고 몇 차례 말했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고 집요하게 기다렸다. 이 녀석 좀 말려주기를 바라며 다른 군인들을 슬쩍 보았지만 그들은 언제 우리와 인사를 나눴냐는 듯이 애써 모른 척하며 카드놀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키리을이 정 그러면 부채라도 달라기에 선뜻 내주었는데 그것을 안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또 기다렸다. 뭐지...? 점점 불쾌하고 기가 막혔지만... 그래 이 녀석은 자신의 시계를 내주었으니.... 괜찮다고 해도 부득불 주고야 만... 정말 기념할 무언가가 갖고 싶은 모양인게지... 차에 설탕을 넣어먹는 것이 신기하다고만 해도 설탕을 한 박스 주는 녀석이니까...라고 분을 삭이며 결국은 내 묵주반지를 빼주며 아내에게 주라고 했다. 신께 기도하는 소중한 것이라고... 만약을 대비해 어릴 때 끼던 낡은 반지를 가지고 온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녀석은 못내 남편의 시계가 아쉬웠는지 전혀 좋아하지 않는 표정으로 내 물건들을 챙겨 들고는 드디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다.
집요하고 일방적인 녀석. 다른 군인들이 모두 내리고 키리을만 모스크바까지 함께 간다는 사실이 못내 마뜩잖았다.
키리을에게 시달리는 우리를 구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는지 건너편 녀석들이 빵을 두 개나 건네주었다. 빵이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조금이나마 불쾌한 기분에 위로가 되었다.
날씨는 하루 종일 찌뿌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