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의 도시, 볼리비아 라 파즈

by 신지명

자정이 되어서 볼리비아 산타크루즈 Santa Cruze 공항에 도착했다. 아침 여덟 시까지 대기였다. 한숨 잠이라도 자려고 했으나 밀린 일기를 쓰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남편은 여행을 와서도 결국 야근을 하느냐며 몸이 상하는 걸 누구 탓을 하겠느냐고 혀를 찼다.

나도...
동감이다...

성격이 팔자라는 말은 오랜 세월의 통찰에 근거한 말임이 분명하다.


볼리비아 비자는 인당 53달러 주고 공항에서 살 수 있다. 비자받고 나오니 우리 가방만 덩그러니...2만원 넘는 황열병 예방접종 증명서는 요구하지 않아 여행 내내 빛도 보지 못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라 파즈 La Paz는 나에게 있어서 이과수 폭포보다 더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해발 3,600m의 고지대에 만들어진 도시,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도의 위엄은 실로 엄청났다. 주변은 온통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황토색의 척박한 산뿐인데 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다닥다닥 지어진 집들이 고원에 펼쳐졌다. 자연의 신비로움만큼이나 인간의 생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뒤의 언덕은 나무 대신 집들이 뒤덮고 있었다.


공항에 내려 가까이 들여다본 라파즈는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온통 흙먼지 풀풀 날리는 거리의 허름함에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번지르르하게 지어놓은 공항을 나서는 순간 영화 촬영을 위해 지어놓은 세트장을 벗어난 것처럼 황량한 마을이 이질적으로 이어졌다. 현지인들이 어색한 직원복을 입고 공항 밖에 있는 자신들의 터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공간의 시설들을 열심히도 쓸고 닦고 있었다.

볼리비아는 그렇게... 너무나도 낯설게 시작되었다.



공항 건물을 나와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니 바로 맞은편 길가에 버스 정류장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다. 낡은 미니버스가 도착해 사람들을 가득 싣고 출발했다. 한 대를 보내고 두 번째 버스에 올랐다.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실제로 보니 너무나도 생소한 인디오 Indio들과 살을 부빈 채 한참을 들썩거리며 달렸다. 남편은 연신 좁은 자리를 더 좁게 만드는 우리의 가방들 때문에 미안해했다. 나는 우리의 목적지에서 이들을 헤치고 좁은 버스에서 내릴 일도 막막했다.


좁디 좁은 버스 안.


굽이굽이 높은 길을 돌아나가는 버스에서 내다보니 온통 흙색의 네모난 집들이 산을 뒤덮고 있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도라고는 하지만 고층빌딩 하나 없이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흙먼지로 희뿌연 하늘이 그 위를 덮고 있어 더욱 아득해 보였다.

지도 상으로는 공항에서 버스터미널까지가 고작 5~6km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밀집된 건물들을 크게 둘러 매끈하게 정비된 나름의 고속도로를 이십 분이 넘게 달리고 나서야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기사에게 버스터미널임을 재차 확인받고 실례의 말을 거듭하며 가방과 함께 좁은 버스에서 겨우 탈출했다. 둘이 합해 고작 10 볼(약 1,600원) 밖에 안 되는 소박한 버스비에 이곳이 볼리비아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수많은 행상꾼들이었다. 그들은 버스가 정차하는 곳부터 터미널로 들어서는 입구까지 목 진 곳에 죽 늘어져 있었다. 팔고 있는 것은 대부분 음식이나 작은 기념품처럼 소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몇몇 상인들의 곁에는 어린아이 한두 명이 함께 앉아있었다. 볼따구니가 꾀죄죄하게 부르튼 어린아이들은 엄마 곁에 앉아서 맨 손으로 희멀건한 밥알을 떠먹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그네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는 것은 어쩌면 그럴싸하게 정돈된 도시의 삶이 더 우월하고 그들의 길바닥 삶은 불쌍하고 안된 것이라고 구분 짓는 자만심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었다. 이들이 어떠한 삶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두고 살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나의 잣대로 이들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공허한 눈빛은 못내 지워지지 않아 목구멍이 가슬거렸다.

버스터미널의 첫인상은 아이러니하게도 파리의 생 라자르 Saint-Lazare 기차역을 떠오르게 했다. 아마도 거대하고 편평한 벽 위로 철골이 보이는 삼각형의 지붕이 얹혀 있고 창문들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터미널 안은 호객꾼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수크레 Sucre! 수크레 Sucre!"

"포토시 Potosi! 포토시 Potosi!"

또렷하고 옹골진 목소리들은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 골목의 상인들과 견줄만 했다.

칸칸이 이어진 매표소 창구들에 쓰여 있는 도시 이름들을 보니 이곳에서 출발하는 버스들이 볼리비아는 말할 것도 없고 칠레며 페루며 안 가는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한 '오마르 OMAR'라는 버스 회사의 창구를 찾아 버스표를 받았다. 버스표를 인터넷으로 예매하는 것은 막상 이곳에 와서 보니 도시 샌님 같은 짓이었다. 가격도 수수료 때문에 조금 더 비싼 것 같았다. 남미 여행이 처음이라 지레 불안해한 탓이었다. 호되게 험난한 삶을 살아보지 않아서, 내가 견딜 수 있는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오는 불안이었다. 70여 일을 돌아다니고도 없어지지 않는 불안이면 평생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친절한 버스회사 여직원이 자신의 좁은 사무실에 우리의 거대한 가방을 맡아주어 우리는 가벼운 몸으로 시내를 좀 둘러보러 나설 수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라는 말은 일을 허탕 칠 때나 쓰는 말이지만 오늘만큼은 좋은 의미로 쓸 수 있었다. 터미널에서 큰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무슨 큰 축제가 열리는 것 같았다. 인도에는 구경꾼들을 위한 의자가 가득 놓여 있고 차도 위에는 축제 참가자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대기 중이었다. 우리가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음악이 연주되고 사람들이 행진을 시작했다. 스페인어를 모르니 그들이 들고 있는 현수막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알리가 없었지만 작은 마을별로 주제를 정해 춤을 추며 이동하는 것 같았다.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흥겨운 음악에 우리도 그들과 발을 맞춰 춤을 추며 걸었다. 맥주를 손에 들고 이미 얼굴이 벌게진 참가자들도 있었다.





길거리에는 희한한 간식거리들을 파는 장사꾼들이 돌아다녔는데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뭔가 맛있어 보였다. 우리도 아침을 거른 터라 먹을만한 음식을 찾아 나섰다. 화장실을 함께 이용할 겸 들어간 식당에는 가스냄새가 진동을 해서 그냥 나오고 다른 곳에서도 돈을 내고- 화장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1볼, 160원 정도다.- 화장실만 이용한 뒤 그냥 나왔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 음식이 보이지 않으니 식당에서 먹을만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길거리 음식을 찾아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어디서 파는 것인지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행렬때문에 경찰들이 여기저기 길을 막고 있어서 골목골목으로 건너 다니느라 거리를 빙빙 돌아야 했다.



차도의 뒷골목에 이르니 포장마차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밥과 닭고기를 한 접시에 내주는 리어카 앞에 앉아 두 그릇을 시켰다. 아주머니는 음식 통을 덮어놓은 이불을 들추고 커다란 닭고기 덩어리를 접시에 담고는 소스를 듬뿍 얹어 주었다.
음식은 예상외로 너무 맛있었다. 고기에 곁들여먹으라고 얹어준 갈은 토마토소스는 약간의 식초와 고춧가루가 섞여 상큼하기 그지없었다. 식후에 한 사발 떠주는 닭국물까지 들이켜고 나니 배가 그득했다. 남편은 고기를 통째로 올려놓고 즉석에서 그것을 썰어 햄버거를 만들어주는 포장마차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맛있고 배부른 식사까지는 참 좋았는데... 어제저녁 한국에서 사 온 고산병 약을 미리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햇빛과 쿵쿵거리는 북소리, 잔뜩 먹은 음식을 품은 채 힘겹게 올라야 했던 가파른 언덕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숨을 쉬는 것도 매우 힘이 들었다. 최대한 숨이 차지 않도록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올라가 겨우 터미널로 다시 들어갔다. 그늘에 몸을 뉘이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해발 3,600m의 고산지대를 처음 겪어보는 내 몸에게는 다소 무리스러운 시작이었다.

긴 의자에 몸을 누인 지 5분이나 지났을까? 남편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눈을 떴다.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남편이 말했다.

"카메라가 없어졌어."

방금 전까지 그것은 분명 내 발치에 있었다. 떨어질까 봐 내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이지? 여전히 지끈거리는 무거운 머리를 일으켜 앉았다. 가방이며 옷을 이리저리 들추고 살펴봐도 그것은 없었다. 혹시나 범행 상황을 누가 목격하지는 않았을까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무심한 눈빛만 던졌다.

기억을 더듬어 볼만한 것도 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누웠고 남편이 나에게 옷을 덮어주었고 남편이 의자에 앉았다. 틈이 있었다면 남편이 나에게 옷을 덮어준 그때뿐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 두 사람의 주의가 흐트러진 그 순간에 우리의 카메라는 누군가의 손에 들려 사라진 것 같았다. 전혀 수상한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낯선 동양인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여러 명 앉아 있었다. 아무도 도난의 순간을 보지 못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범자처럼 느껴졌다.

"수크레 Sucre! 수크레 Sucre!"

"포토시 Potosi! 포토시 Potosi!"

아까와 다를 바 없는 호객 소리가 넋이 나간 내 머릿속을 댕... 댕... 울렸다.

그러나 황당함과 분노도 잠시였다. 나는 금세 평온을 찾았다. 여기는 남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남아메리카. 마치 갯벌에서는 온몸에 진흙을 묻혀야 제맛인 것처럼 남미에서 이 정도 사건쯤은 겪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순례길을 걸으며 나름 사건사고에 친숙해지기도 했다.

나는 다시 묵직한 머리를 눕히곤 잠이 들었다.

나의 빠른 포기에는 예전 스리랑카에서의 소매치기 경험도 한몫했다. 기차역에서 카메라 소매치기를 당하고 보험사 제출용 도난 신고서를 받으러 다니느라 고생 고생하다가 결국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별반 소득이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 잔 것 같았다. 남편이 나를 또 흔들어 깨웠다.

남편은 나와는 생각이 좀 달랐던 모양이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 여행자 경찰을 찾아 상황을 이야기하고 시내의 큰 경찰서 위치를 알아왔다고 했다.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으니 한 번 가보기나 하자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새어 나오는 남편의 씁쓸한 표정을 외면할 수 없어서 나는 짐을 챙겨 들고 남편을 따라나섰다.

좁은 골목길을 다니는 미니버스에 올라타고 경찰서까지 가는 십여 분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남편은 심란해서였고 나는 아무 기대가 없어서였다.

경찰서에 들어서긴 했지만 우리는 스페인어가 안 되었고, 그들은 영어가 안 되었다. 나는 그들이 가져다준 빈 종이에 네모와 졸라맨을 그려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입한 여행자 보험으로 보상을 받기 위해 필요한 도난 신고서를 발급해주세요.'라는 속내는 '페이퍼 paper, 스탬프 stemp 꽝꽝!'으로 대신했다.

그래도 신기한 동양사람의 격한 몸짓이 흥미로웠는지 몇몇 경찰관들이 모여들었고 영어를 몇 마디 할 줄 아는 경찰관도 뒤늦게 불려 나왔다. 그는 우리를 작은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모든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그리고 그는 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고 했다... 50 볼, 약 8,000원. 그리 큰 액수는 아니지만 여행자인 우리에게는 큰 지출이었고 이들의 물가에 대비해도 사실 과한 금액이라고 여겨졌다. 증명서를 발급받으면서 그렇게 큰돈을 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생각은 물론 그랬지만... 기대하지 않은 일의 성사에 기쁜 나머지 협상의 여지도 없이 그의 요구에 동의해버렸다. 그의 당연한 업무임에 틀림없는데 마치 그가 하해와 같은 친절을 베푼 것만 같은 착각이 든 탓도 있었다.

우리의 흔쾌한 동의가 그도 만족스러웠는지 사건 내용을 무척이나 세심하게 물어보고 꼼꼼하게 서류를 작성해주었다. 검지 손가락만으로 컴퓨터 자판을 하나하나 두드려 작성한 서류가 출력되어 우리 손에 넘겨졌고 그와 남편, 그와 나는 묵직한 악수를 나눴다. 단 돈 8,000원으로 성인 셋이 이렇게 만족스러워할 일은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라 파즈의 경찰서. 저 창구에 서서 나는 졸라맨을 그렸다.


나는 앞으로의 남은 일정 동안 그 서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가방 깊숙한 곳에 고이 접어 넣었다. 그리고 남편은 삼각대와 카메라를 연결하는 플레이트까지 함께 사라져서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삼각대를 쓰레기통 옆에 세워두었다. 우리 가방을 가져간 놈이 필요하면 가져가 쓰겠지 뭐... 범인은 범행 현장에 반드시 다시 나타날테니 말이다. 이래저래 남편은 무거운 짐을 두 개나 덜어낸 셈이었다.

우유니로 향하는 버스가 저녁 여섯 시에 출발했다. 허름하고 열악한 도시의 풍경과 달리 버스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편안한 고급 버스였다. 의자의 넓이도 넓이거니와 쿠션도 제법 푹신했고 누울 수 있도록 뒤로 한껏 젖혀지기도 해서 밤을 보내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카마 cama 등급과 세미 카마 semicama는 가격차이가 얼마 나지 않지만 세미 카마의 의자는 좀 좁고 뒤로 많이 젖혀지지도 않는다고 하니 장거리를 가려면 카마를 예약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것 같다.
반나절을 찐하게 겪은 라파즈를 떠나 이제 내일 아침까지 꼬박 열세 시간을 달릴 예정이다. 우유니 Uyuni는 결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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