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 천태만상

아빠는 자란다.

by 앵그리파파

삼 형제 중 막내로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대부분의 옷을 형들에게 물려받아 입었다. 우리 집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머니께서 특히 옷이나 신발 같은 물건을 새로 사는 것에 인색하셨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경제 호황기를 겪었던 베이비붐 세대, 즉 우리 부모님과 같은 세대는 격동의 시기를 겪으며 절약과 근면을 미덕으로 삼았다.


멀쩡한데 왜 버려?


어렸을 때부터 형들에게 물려받은 옷만 입고 자라서 그런지 중고 물품에 대한 거부감이 남달랐다. 내가 직접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장만한 옷과 신발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생겼고, 이왕 사는 물건은 좋은 것을 사고 잘 관리하는 버릇도 생겼다. 특히 내 돈으로 산 자동차는 내 것에 대한 집착의 끝판왕으로, 애지중지하며 특별한 가치를 부여했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을 때는 그 기쁨이 오죽했겠는가!


그런 내게 당근마켓은 가끔 내 물건을 팔거나 나눔의 용도로만 활용했지, 실제로 중고물품을 사는 경우는 없었다. 내 인생의 중고 물품은 어렸을 때 평생 받아서 썼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동차도 한 번도 중고차를 산 적이 없으니 말 다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나의 고정관념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중고 물품은 재활용 가치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100%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나는 사용하는 의자가 너무 낡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이 의자는 첫째 아이가 어렸을 때 사용한 것으로, 꽤 오래된 것이었다. 의자를 새로 장만하고 싶던 찰나, 우연히 당근마켓에 들어갔을 때 A급으로 보이는 브랜드 의자들이 저렴하게 거래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당근마켓에 올라오는 수많은 중고 물품을 서치 하는 습관이 생겼다.


단순히 좋은 중고 물품을 고르기 위해 당근마켓에 접속한 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괜찮은 중고 의자를 찾으려던 목적이었지만, 사람들이 올려놓은 중고 물품을 들여다보며 묘한 인간 군상을 구경하는 재미가 생겼다. 각기 다른 사연으로 물건을 내놓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때로는 한 편의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글은 단순한 거래 글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조각들이었다.


"사실 제가 절대 팔고 싶지 않은 물건인데요.
제가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사 갈 집하고 사이즈가 맞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물건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분이 이 물건을 가져갔으면 좋겠네요.
참고로 네고와 환불은 불가입니다."


재밌지 않은가? 그냥 물건을 내놓으면 될 것을, 굳이 저런 사연을 구구절절 적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결국 좋은 물건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물건이라면 오히려 더 관심이 가지 않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가게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들이 당근마켓을 활용해 판매를 하는 경우도 보인다. 대략 이런 식으로 글이 올라온다.


"새 상품입니다. 사정상 당근에 팔게 되었습니다.
직거래는 어렵고 택배만 가능합니다.
반값 택배비용으로 처리합니다.
환불은 불가이니 신중히 보시고 의견 주세요. "


실제로 가격을 보면 시중 판매가보다 조금 저렴하게 팔리고 있었다. 아마 당근마켓을 활용해 할인 프로모션 효과를 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아파트 매매나 고가의 자동차가 직거래로 올라오기도 한다. 주변 아파트 매매나 전세 시세를 당근마켓을 통해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당근 마켓에서 여러 모임도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참여해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다. 여하튼 당근마켓은 여러모로 인간다움이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중고 물품, 그 물품에는 서사가 있고, 그 서사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머니는 아파트에서 재활용으로 버리는 수많은 물건들을 깨끗이 씻고 수리해서 어려운 분들에게 나눠주신다. 그런 물건들이 쌓이고 쌓여 방 한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아려온다. 어머니는 최근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셨다. 내가 그만하시라고 몇 번 얘기했지만, 멀쩡한 물건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보면 너무 아깝다고 하셨다. 그 모습은 과거 공산품이 가장 비싼 시대를 사신 어머니 기억의 습작일 것이다.


최악의 경기 불황을 겪고 있는 요즘, 당근마켓에는 사무실 물건을 정리한다는 게시물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이제 당근마켓은 단순한 중고 거래 플랫폼을 넘어,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당근마켓에 접속해 물건들에 담긴 천태만상의 이야기를 엿본다. 어쩌면 나도 안 쓰는 물건을 좀 팔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근마켓에는 단순한 물건 거래 이상의, 인간적인 면모가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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