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학과 복수 전공 시절
학부 시절 문창과를 복수 전공했을 때 일이었다. 당시 나는 막 학기를 앞두고 있었다. 졸업하면 더 이상 소설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생각에 한 학기에 소설 전공을 무려 세 개나 신청했다. (보통 시 1, 희곡 1, 소설 1 가 일반적이었다) 한 학기 소설 전공 세 개는 한 한기에 단편 소설 세 개를 써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시와 희곡은 관심 외였고 나는 각기 다른 교수의 소설 수업을 방식이 궁금했을 뿐. 일개 복수 전공생이 예고와 공모전 출신의 문창과 학생들과 견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소설 하나를 써서 세 수업에 모두 돌려 막기한 것. 세 수업은 수강 학년이 달라서 겹치는 학우들이 없었다. 원래는 다른 수업에 낸 소설은 내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긴 하다만, 세 수업을 모두 듣고 싶은 나로선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소설 수업 1은 외부에서 온 시간 강사가 맡았다. 소설 수업 3은 문창과 3학년 학생들이 듣는 수업으로 문학평론가 출신의 나이가 지긋한 교수가 맡았다. 소설 수업 4는 학부 4학년 전공으로 문단에서 꽤나 잘 나가고 상복도 있는 나름 젊은 교수가 맡았다.
세 수업에 동일한 소설을 제출한 일이 알려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지금은 좀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동일한 소설에 대한 평가가 세 교수가 모두 각기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1년 간 휴학을 하고 긴 여행을 다녀왔다. 그 여행 경험에 살을 붙여 여행 소설 형식의 글을 제출했는데, 나의 실제 여행의 경험에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결합한 소설이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임종을 앞둔 이모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떠난 조카 손녀의 여행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론가 출신의 나이가 지긋한 교수는 나의 여행 이야기를 극찬했다. 구체적인 묘사에 어떻게 썼냐고 물었고, 나는 직접 다녀온 경험이라고 답했다. 그 교수는 소설 속 인물의 생각의 흐름도 좋다며 앞의 이모할머니와 조카손녀의 이야기를 지우고 여행 경험을 살려 이 이야기를 확대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피드백을 했다. 작가의 개성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느낌이었다.
문단에서 잘 나가는 젊은 교수 또한 내 소설이 두 개의 이야기로 나누어 구성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곤 여행 이야기를 지우고 이모할머니의 이야기를 더 써보는 것을 제안했다. 사실 여행 이야기보다 이모할머니의 이야기가 더 한국의 단편 ‘소설스러운’ 소재이자 전개라는 건 나도 알고 느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소설 본연의 역할이자 기능에 더 열의를 보이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시간 강사 또한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을 언급한 후에,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진 않고 둘 중 한 이야기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자신의 가치 판단을 덜 들여(의도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작가에게 선택권을 부여했다.
너무 흥미로운 피드백이었다. 교수마다 피드백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니. 학생들에게 교수의 평가는 절대적이다. 그 분야가 예술이어도 그렇다.
만약 내가 문단에서 인기 있는 소위 잘 나가는 교수의 피드백만 들었더라면, 여행 이야기를 쓴 나 자신이 매우 창피해서 앞으로 절대 여행 소설은 쳐다도 보지 않았을 거다. 반면 여행 이야기를 칭찬한 교수의 수업만 들었더라면 단편 소설의 감을 찾지 못한 채 내 흥에만 취해 여행 에세이를 썼을 것이고. 마지막으로 시간 강사의 수업만 들었더라면 두 이야기의 장단점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개성을 지키고, 또 나의 개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고 세상에 어떻게 융화할 것인지 늘 항상 생각해야 한다. 5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잃어버리지도 그렇다고 세상을 너무 등한시하지도 않으려고 계속 발버둥 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