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 편
독립영화 촬영을 끝내고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번아웃이 크게 왔던 해에 제주살이를 보냈었고 그 이후부터 제주도는 내게 ‘친정집’ 같은 곳이 됐다. 그곳엔 나의 베프와 마음으로 낳아준 어멍이 살고 있었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에서 하는 일 없이 놀고먹기만을 반복했다.
슬슬 노는 것도 지쳐갈 때 즈음 친구가 내게 제안했다.
“심심하면 윗세오름에 올라가 봐. 지금 철쭉철인데 정말 예뻐. 그리고 지금 아니면 못 봐.”
아주 잠깐 관’ 악’ 산의 고통이 스쳤다. '아니야. 여긴 산이 아니라 오름이잖아?’ 하고 생각하며 며칠 전 친구와 올랐던 오름을 떠올렸다. 윗세오름을 검색했다. 진분홍색 철쭉이 만발한 그곳은 너무 신비로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이곳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윗세오름 가려고. 내일!”
관악산의 내 컨디션을 보았던 그는 챙겨야 할 준비물과 주차장의 위치, 출발시각 등 꼼꼼히 알려주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안심시켜주었고 그 덕분에 용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그들이 내 옆에 없었다. 물을 챙겨줄 사람도 남은 거리를 속이며 응원을 해줄 사람도 내일은 없을 터였다.
“근데 내일 비소식이 있는데 괜찮겠어?”
무식이 용감하다,라는 말이 딱 맞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몰라서 가능했던 날들이었다. 비쯤이야 맞으면 되지, 비 맞으면 더 운치 있잖아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심 일기예보가 틀리길 바라면서)
그런데 정말로 비가 왔다. 출발할 때는 맑았던 하늘이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캄캄해졌고 끝내 비가 내렸다. 차에서 내리 기전 잠시 고민을 했다. 가방에 있는 김밥을 바라봤다. 물론 집에 돌아가도 되지만 집에서 먹는 김밥을 상상하니 왠지 아쉬웠다. ‘그래 일단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내려오면 되지.’ 혼자여서 가능한 결정이었다. 나는 정말로 내려오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입구를 지나자 우거진 나무길이 보였다. 어둑한 초록잎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물을 머금은 숲 냄새, 차가운 아침 공기가 어우러졌다. 정말 좋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번에도 초반 기세는 좋았다. 앞에 가는 커플 분들을 친구 삼아 성큼 올라갔다. 경사가 시작되자 허벅지가 묵직해져 왔다. 숨이 턱에 닿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30분이 지났고 드디어 본격적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몸이 흔들릴 정도였고 안개는 자욱했다. 뺨을 때리는 빗줄기에 김밥이 걱정됐다. 나는 수건으로 김밥을 돌돌 감싸줬다. 순간 웃음이 났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네,라고 생각했다.
비를 맞는 기분이 꽤 좋았다. 무엇보다 가벼웠다. 힘이 들면 나무 밑에 들어가 오이를 먹었다. 비를 맞은 오이는 더 시원했다. 셀카도 찍었다. 생쥐 같은 내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그래, 나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안개로 주변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멋이었다. 상황이 나빴을 뿐,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안녕 못해유~”
내려오는 분들과 나누는 산속의 인사법에 힘이 났다. 이렇게 놀면서 올라가다 보니 안개 사이로 철쭉이 희끗 보였다. ‘저기 있구나’ 나는 사진 속 그 풍경을 잠시 상상했다. 안개 낀 사이로 보이는 나무 기둥들은 황량함의 멋을 더했고 그 모습이 너무도 쓸쓸해 보여서 한참을 보기도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걷는 안갯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인생을 떠올렸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은 길을 걸으며 사는 일과 정말 닮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이 걸음은 더 이상 정상을 향한 게 아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눈앞의 모습들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정상석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처럼 살아야겠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사는 길이 꼭 오늘 같으면 좋겠다. 정상만을 향해 오르는 인생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멋을 발견하여도 상황이 나빠져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먹으며 느리더라도 나만의 속도로 유지하는 살면 바라는 게 보이지 않아도 꽤 즐거운 인생일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지막 걸음이 다시 입구를 밟았을 때의 기분이 생생하다. 그날의 습도와 바람, 기분까지도 나는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이 하루의 좋은 기분이 훗날 내 삶의 발자국이 되어주고 있다. 즐거움과 괴로움, 무엇으로 남길 것인가는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