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의 10년
‘다시 내려올 걸 힘들게 왜 올라가?’
경치 좋고 공기 좋고 입맛까지 좋아지는 거 다 알겠는데 왜, 굳이 터울터울 기쁨을 느껴야 하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지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산책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숲 속에서의 산책은 이슬의 온기를 볼 수도 느낄 수 도 있다. 기다란 나무들로 가득 찬 곳 안에 있으면 안정감을 통해 신선해지는 기분이 아주 맛나다. 거기다 뽀송뽀송한 상태로 인증샷도 남길 수 있다!
내 인생의 첫 '등산'은 100대 명산을 타는 친구들과 함께 오른 '관악산'이었다. 산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찾았다던 두 친구는 수년동안 자신들이 받은 사랑을 자랑해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 입장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기에 친구가 비밀병기로 내놓은 ‘정상에서 먹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밥의 맛’ 에 홀려 극 P의 약속 잡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산 까이껏 그냥 타면 되는 거 아냐? 내가 그래도 헬스경력이 몇 년인데, 등산화 없어도 되지? 가자!'
솔직히 좀 자신 있었다. 나는 공복유산소를 하러 가듯 아주 가볍고 산뜻하게 출발했다.
'악'자가 들어간 산은 악소리가 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관악산은 경사로 시작되어 경사로 끝나는, '악'으로 시작되어 '악소리도' 내지 못하게 만드는, 살벌하게 사람을 잡는 코스였다. 심지어 얼마나 등산객이 많던지, 비좁은 산길에 인간 에스컬레이터가 깔린 줄 알았다.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올라왔고 등산 초보자는 나는 그 사이에 껴서 닥치고 올라가야만 했다. 이건 내게 거의 실미도 훈련과도 같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새 소리나 물소리의 파장으로 몸이 간지러워지는 호사는 땀으로 씻겨져 내려갔고 거친 숨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만이 나의 귓구멍을 한쪽씩 막아버릴 뿐이었다. 이건 몰래카메라에 가까웠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지금 한 것만큼 두 번만 더 하면 돼'
중간쯤 되자 친구들의 격려가 일초의 걸림도 없이 내 마음에서 통과했다. 슬슬 그들을 향한 원망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등산화 없어도 된다며! 나무 계단이라며! 발바닥 아파 죽겠네. 아니, 등산이 처음인 사람을 데리고 왜 여기로 온 거야? 으이씨.. 지들한테 쉽다고.. 아 힘들어 미치겠네..'
대충 이런 마음이 들다가도 내 페이스에 맞춰 기다려주는 친구의 얼굴을 보면 미소가 올랐고 좋은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데리고 온 친구가 고마웠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에 허덕이며 올라갔다. 고비는 계속해서 찾아왔고 산 에서의 10분은 꼭 한시간의 속도로 흐르는 것 같았다. 2/3 지점이 되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게 니들이 말하는 인생의 의미니?' 표정 없이 태어난 사람의 얼굴로 오로지 정상만 생각했다. 이 간절함은 고통에서 태어났으며 압박과 짜증을 먹으며 자라났다. 즐거움이 돈을 주고도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즐거움이 없는데 정상을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산을 같이 즐기는 것도 아닌데 뭔 사서 고생인 건지, 오만가지의 불평불만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 진짜, 그만하고 싶다..'
죽음을 포함한 인생의 모든 일들은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이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기쁨에 도취한 사람들과 인증샷을 남기는 사람들로 코딱지만 한 정상 바닥이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앉아서 쉴 자리까지 줄 서야 할 만큼 유명한 맛집 앞 광경처럼 정신이 없었다. 정상만 바라보면서 올라왔는데 너무너무 허무했다. 우리는 겨우 구석진 그늘을 찾을 수 있었다. 친구가 무겁게 들고 와준 김밥과 커피를 마시며 안정을 되찾았지만 이내 내려갈 길에 대한 염려가 올라왔다. 정상에서 머문 20분의 짜릿함은 춤추듯이 풀려버린 다리로 하산하는 동안 사라져 버렸고 종아리 경련으로 다시 괴로움이 출연하면서 그날은 다시는 내 인생에 산은 없을 거라는 굳은 확신에 굳이 확신을 더 해주었다. 완전히 질려버린 채로 집으로 가며 다짐했다.
'내 인생의 두 번의 산은 없다. 안녕 잘 있어라. 다시는 보지 말자.'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시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날은 지독하게 힘들기만 했던 날로 장기 기억장에 무표정으로 자는 중이다.
‘버티는 사람이 성공한다,’ ‘일단 버텨, 버티면 돼!’
우리 쪽 분야에서는 ‘버티다’의 미덕을 높이 사는 편이다. 마치 버티기만 하면 원하는 무엇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꼭, 내가 관악산을 오르던 그 모습과 닮았다. 한 분야에서 10년을 일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간혹 10년이란 시간에 관례적인 의미를 담는다.
대학입시부터 시작한 동료배우들은 서른의 문턱 앞에서 많이 흔들렸다. '오로지 한 길만 판다' 쪽과 '제2의 직업을 같이 하는' 쪽이 나뉘었다. 이 사이에서 나는 비전공자로 늦깎이 신인으로서 입사 3년 차의 시간을 정신없이 보내느라 아홉수의 통증도 서른 살의 타격도 받지 못했다. 같은 시기, 주변의 동료들과 달리 열정이 가득했던 나 자신이 특수하게 느껴졌다. 이 오만한 생각 아래에서 저들의 고민은 먼 나라의 일들로 보였고 버티기만 하면 언젠가는 내 번호표가 행운의 여신에게 불릴 날이 올 거라는 확신으로 미래를 바라봤다. 두려움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한 가설을 짓는지도 모르는채로. 역시나 내가 열외가 된 건 아니었다, 단지 내 차례가 오지 않았을 뿐.
유명해졌거나 혹은 결혼을 하거나 또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함께하던 동료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무렵, 불사신 같던 나의 희망의 빛마저 어둠에게 먹히고 있었다. 무지하게 버틴 10년은 무리하게 올라간 산행처럼 압박과 불안의 시간으로 점점 변해갔다. 정상에서 먹은 김밥과 라면의 맛, 끝까지 손을 잡아준 친구들의 얼굴이 고통의 그림자 아래 가려져 없어진 기억이 된 것처럼 처음 오디션에 붙었을 때의 기쁨, 리딩날 느끼던 긴장감과 신기함,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연기하던 순간들, 고민하고 미래를 꿈꾸던 내 모습들은 패배자라는 그림자 속에 가려져 전부 없던 이야기로 사라져 갔다. 오디션장에서 마주치는 다른 배우들과의 비교가 커지면서 자신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500:1의 경쟁률을 뚫고 받은 배역으로도 '내 인생의 내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10년을 버텨도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아직도 사람들은 나를 배우로 알아보지 않았다.
실패한 현실의 원인은 순연히 내가 연기를 못하기 때문이라는 자책으로 깊은 절망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절망감의 세포는 빠르고 크게 증식했고 하루하루 버티며 사는 일이 버거울 만큼 나의 영혼은 검게 물들어갔다. 버티는 일은 내 영혼을 갉아먹으며 낭떠러지 앞까지 끌고 갔다. 정상만을 생각하며 올랐던 그날의 산행처럼 오로지 배우로서의 성공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지만 현실이라는 산에는 정상까지 남은 거리와 방향이 적힌 표지판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데뷔 10년 차를 맞이했다. 단 한 번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사랑한 연기자생활에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휴가도 없는 1분 대기조의 상태로 10년을 버틴 몸은 긴장으로 숨 쉬고 불안이란 피로 생존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몸과 마음을 정신력으로 애써 무시했지만 결국 위기의 문고리를 잡게 되었다.
' 저 10년 버텼어요! 버텼다고요! '
꿈과 현실의 괴리가 멀어질수록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꿈은 내 목을 졸랐고 나의 일상은 죽어갔다. 악으로 버틸수록 연기에 더 매달리게 됐고 연기에만 집착하게 됐다. 삶의 균형이 무너져갔다. 티를 내지 않아도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갔고 사람들은 걱정을 보내왔다. 관심이 부담처럼 느껴졌다. 표정도 사라져 갔다. 밝음이란 화장을 빼먹지 않고 나가야만 했다. 촬영장도 더 이상 반갑지 않았다. 연기는 숙제가 되었고 늘 숙제를 마치지 못한 학생으로 학교에 가는 기분으로 촬영장에 갔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지, 나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뭐가 문제인지 어디에 물어야 하는지 몰랐다.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무기력하게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다 달았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커버이미지 출처 : 영화 <블랜스완>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