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 편
“산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어. 공기도 바람도 전혀 달라.
(감탄하며) 이건 절대 지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맛이야.”
“등산은 마음만 먹으면 정상에 갈 수 있어. 인생은 그렇지 않잖아? 나는 그게 좋아. 정상석은 항상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거든. 산을 다니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 못할게 없어진 기분이야.”
‘산’으로 가는 대화 속에서 나만 미지근했다. 산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그들의 멋진 경험담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게 들렸다. 내려올 길을 왜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몇 년 후, 그들은 산악인이 되어 있었다. 제법 전문적으로 보였다. 풀 장비를 갖춘 그들 사이에 뒷산 마실정도 가는 차림으로 껴있던 나는 생애 처음으로 '등산'이라는 걸 해볼 참이었다.
“우리가 다 준비할게. 몸만 와.”
전도사들은 생수 하나도 못 들게 했다. 나는 팔자에도 없던 의전(?)을 받으며 관'악'산 입구를 막 지나고 있었다.
아침공기는 상쾌했다. 이른 시간에도 사람들은 벌써 산에 오르고 있었다. (내려오는 분들도 있었다)
아빠에게 물려받은 운동신경으로 성큼성큼 돌계단을 오르며 초반 기세를 몰아갔다.
“헉.. 헉..”
“좀 쉬었다 갈까?”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에서 얼음물을 꺼내 주는 그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십분 밖에.. 안됐..다고어? 헉헉.."
지금이라도 내려갈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체감은 삼십분도 더 지난 것 같은데 고작 십 분이라니, 십 분이라니. 앞으로 남은 길이 까마득했다. 보이지도 않은 정상, 언제 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파른 길이 시작됐다. 비좁은 등산로에 사람들은 일방통행으로 끝없이 오르고 내려왔다. 허리라도 한 번 펴볼까 발을 멈추면 뒷사람들도 차례대로 멈춰야 했다. 교통체증의 주범이 되는 기분이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63 빌딩 계단을 오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 건가. 내가 상상한 등산은 이런 게 아니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햇살에 비치는 나뭇잎을 보며 자연과 함께 하는 프레시함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반면에 그녀는 다람쥐 같았다. 처음에는 나와 함께 걸었지만 어느새 답답했는지 후다닥 뛰어 올라가 저 멀리서 기다리고 다시 뛰어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그는 묵묵히 내 뒤에 있었다.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들이 왠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게 전부다. 불편하고 힘들게 앞사람의 발자국만 본 기억 밖에 없는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나무보다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음료수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부터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까지 인산인해 한 풍경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바람 좋고 경치 좋은 명당은 이미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는 보이는 아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공복에 세 시간 산행 후 먹는 김밥과 선선한 그늘 아래에 있으니 지난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친구들이 왜 산을 좋아하게 됐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고생한 뒤에 먹는 라면과 김밥, 묘한 성취감, 뭐 나쁘지 않네!
“이제 내려가자.”
노곤해진 몸을 다시 일으켰다.
“내려가는 건 얼마나 걸려?”
내려가기도 전에 걱정이 앞섰다. 올라온 거리를 생각하니 막막했다. 장비도 없이 높은 돌계단을 내려오는 길은 더 험난했다. 차라리 다시 오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릎이 아파왔고 운동화 밑창이 뚫릴 것 같았다. 이번에도 도로 사정은 같았다. 사람들이 계속 밀려왔고 이번에도 앞사람의 발자국만 따르며 내려왔다.
주변을 보지 않고 오르기만 했던 산행이 꼭, 배우로 성공하는 것만 보며 달려온 나의 10년의 모습 같다. ’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며 살았던 세월 속에는 '사는 일'들은 전부 뒷전이었다. 친구들과 보내는 휴가나 가족들과의 시간까지도 뒤로 미뤘었다. 삶을 비추는 것이 연기라는 걸 몰랐던 시절이었고 한 곳만 보며 사는 게 노력이라 자신했다.
정말로 산은 마음만 먹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상을 향해 오르기만 한 기억은 썩 좋은 경험으로 남지 못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일상을 무시하며 달리기만 하는 여정 역시 좋은 과정으로 남지 못했다. 만약 조금 더 걸리더라도 주변을 보고 소리를 듣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올랐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