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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치지 말 것!

상상 속에 숨겨진 열쇠

by 안 희



이름은 신미선, 직업은 미용사이다. 미용실을 16년째 운영 중이다.


독립영화에서 맡은 인물의 소개다. ‘16년 이라니, 나도 연기를 10년째 하고 있는데 16년 이라니.’ 16년이란 세월이 체감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커트와 파마를 시술하는 장면을 연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일에 꽤 욕심이 났다. 액션연기를 할 때에도 그랬다. 실제 배우가 했는지 대역이 했는지 티 나지 않을 일에 이상한 오기를 부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용을 배워보기로 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미용학원 선생님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김포에 있는 학원이었다. 교실에는 취직을 앞둔 고등학생 분들이 고객님들의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가위를 잡는 법과 롤을 마는 법을 속성으로 알려주셨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가위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은 금방 쥐가 났고 파마롤은 계속 미끄러졌다. 내 손가락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렵다는 사실이 왜 당사자가 되면 받아들이기 어려워지는 걸까.



마침내 첫 고객님의 머리가 놓아졌다. 물을 사용해 파마를 마는 것이 오늘의 과제였다. 고객님의 머리카락은 좀 뜯겼지만 나는 한 줄을 성공했다. 교실 안에 있는 선생님과 학생분들은 이걸 어떻게 첫날에 하냐며 칭찬으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정말 보람찼다. 비록, 고객님은 힘들었겠지만.


선생님의 배려로 장비와 마네킹머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촬영까지 남은 기간은 3개월, 남다른 각오를 외치며 다시 빗을 들었다.



미용사가 궁금해지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나는 직접 관찰을 하기 위해 동네 미용실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배우인데요. 제가 이번에 맡은 배역 직업이 미용사예요. 혹시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뒤에서 하시는 일을 관찰해도 될까요?”


대부분의 사장님들이 낯선 사람을 먼저 의심하는 반응이었다. 거절은 친절하게 해 주셨지만 나는 의아했다. ‘왜 저렇게 경계를 하실까?’ 잠시 서서 미용실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나 많은 낯선 이들이 저 문을 열고 들어왔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문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미용실을 찾아가는 일은 너무 쉬었다. 거짓말 살짝 보태서 열 걸음 가면 다른 미용실이 나올 정도였다. 이게 장사가 되나? 싶었다. ‘매일 지나는 길이었는데 이것도 몰랐네.’



아무튼 부동산 사장님께서 도와주셔서 허락을 받게 된 나는 노트를 들고 미용실을 찾았다. 머리를 하지 않고 방문 한 건 처음이었다. 오후 세시, 한가한 시간이었다. 햇살이 촤르르 들어오는 곳에 앉아 정적을 느끼고 있으니 잠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원장님도 그런 눈치였다. 손님이 언제 올까, 알 수 없었다. 나는 졸음을 참으며 계속 기다렸다.


손님들은 성격에 따라 여러 모습을 보였지만 원장님의 손은 한결같았다. 말이 없는 손님에게는 긴장을 풀어주는 정도의 토크를 하고 아닌 경우에는 섭섭해하지 않을 딱 적당한 맞장구를 치는 굉장한 실력을 보이면서도 가위와 손은 늘 빨랐다. 미용기술과 서비스기술의 컬래버레이션이 펼쳐지는 곳이라니, 존경심이 올라왔다.


처음으로 보는 미용사의 뒷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빗을 들었다. 마네킹의 머리가 어제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세 시간 만에 완성된 머리를 보며 원장님이 걸어온 세월을 떠올렸다. 만들어질 수 없는 삶의 투쟁과 굳은살이 보였다. 미선이도 그랬을 거다. 매일 손이 굳어지는 걸 참으며 다시 가위를 잡았을 거다. 수많은 낯선 이들의 머리를 만지면서 버티는 법을 익혔을 거다. 그래서 나는 대충 할 수가 없다. 내가 만나는 인물들이 곧 삶을 사는 사람이기에,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누군가이기에, 진짜에 가닿는 노력을 멈출 수 없다. 퉁치지 말자. 그들을 생각하며 내일도 빗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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