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음성을 위하여
얼마 전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분노사회>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의 저자 정지우 작가님을 처음 알게 됐다. 작가님은 부드럽지만 단단하고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틈을 드러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자신감이 묻어나는 나의 추구미까지 묻어났다.
작가님은 꾸준하게 출간을 해 온 작가이자 문화평론가, 그리고 변호사 일을 하고 있는 입장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작가와 변호사라니, 판사를 하시다 책을 쓴 경우는 봤지만 작가를 하시다 변호사 시험을 본 케이스는 처음이라 흥미로웠다. 하지만 내 관심을 끈 건 직업의 종류가 아닌 그 여정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 여정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만든 비결이었다.
현실과 떨어져 살고 있다는 자각으로 취업 준비를 하던 중에 동생의 권유로 변호사 시험을 치르게 된 작가님은 ‘30대 중반의 아이 아빠’라는 환경 안에서 시험공부를 병행해야만 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시험에 합격해야만 하는 이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 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셨고 그 고민 끝에서 극도의 효율을 얻는 자신만의 비결이 탄생 됐다는 말을 하시는데 그 과정을 스스로도 흡족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 보는 나까지 뿌듯해졌다.
작가님 에게만 최적화된 공부 방식은 책을 쓴 경험을 앞세운 글쓰기와 같은 공부법이다. 교과서를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만들고 그 요약본을 녹음해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듣는다. 듣기에도 이 공부법은 상당히 개인적이고 그래서 실용적이며 작가님만 할 수 있는 찰떡같은 방법이라 꽤 효율적이라 생각됐다. 그런데 뒤에 참 재밌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시험에 합격 한 뒤 출근을 하는 일상을 살게 된 작가님은 지옥철에서 책을 읽고 싶었지만 그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더란다. 그중에 딱 하나 읽히는 게 있었다. 바로 자기 계발서다. 지옥철에서 듣는 ‘근로소득 지옥에서 탈출하는 비법’의 이야기는 강력한 끌어당김을 만들었고 실질적인 방법을 드러내지 않는 책들은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넘어가게 만들었다. 확실한 방법을 쫓으며 1년 가까이 읽었지만 끝내 어디에서도 분명한 비법을 찾지 못했다는 농담이 섞인 에피소드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가벼운 웃음으로 끝낼 수 없는 건 돈이라는 가치를 쫓는 대가로 영혼을 미래로 보냈기 때문이다. 미래를 쫓느라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손에서 놓쳤기 때문이다. 아내 분과 다툰 어느 날, 작가님은 불행한 자신을 마주하게 됐고 그날로 자기 계발서를 덮었다 하셨다.
미래뿐 아니라 과거에 살던 나도 현실을 부정하며 살면서 불행과 꽤 오랫동안 동거를 한 경험이 있다. 2019년 늦여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던 그날이 생생한 이유는 나에게 애정결핍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비난을 통해 들었던 기념일 같은 날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엄마 없이 자란 시절이란 사실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이 말은 내 마음에서 쿨 하게 지나가지 못했다. 적중했다. 실제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는 그날 이후로 달라진 내 일상이 보여줬다. ‘디지털 노매드’를 이루어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 사상처럼 애정결핍을 고쳐야만 정상인이 된다는 사상을 따르며 세상에 존재하는 '애정결핍에서 벗어나는 법'이라 나와 있는 것들은 잡히는 대로 따라 했다. 감정일기, 마음 챙김, 산책, 명상, 심리공부는 자아성찰의 능력을 키우는 데 고무적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면의 구조는 층층으로 가리어 있었고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탓에 꼭꼭 숨어버린 ‘나’ 혹은 ‘편안함’과 같은 그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언가와 닿기 위한 여정은 꽤 복잡하고 어려웠다. 나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의문은 쌓여갔고 단순한 애정결핍의 문제만이 있는 게 아니라 더 복잡하고 꼬인 사람이라는 자기부정이 생겨났다. 나에게는 작가님처럼 탁 덮고 현실로 돌아오는 단단함이 없었다. 하루하루 현실과 멀어지며 과거로 걸어 들어갔다.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온통 과거와 연결시켰고 내가 하는 생각들은 전부 과거로부터 탄생됐다. 이렇게 나는 현실에 살고 있는 척 과거에 묶여 사는 중이었다.
내가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된 날은 예상하지 못한 날, 놀라운 방법으로 일어났다.
링클레이터의 보이스 트레이닝은 배우들에게 필요한 음성을 되찾아 주는 훈련이다. 우리는 알기 모르게 많은 가면과 규율 안에서 자신의 소리를 억압하며 살고 있다. 공손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며 착하게 말해야 사탕을 얻는 아이여야 함을 강요받으며 자랐다. 배우는 어떤 인물을 맡게 될지 모르며 어느 인물을 맡더라도 진실성으로 표현하는 걸 목표로 삼기에 실제로 배우가 가진 습관을 없애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의 소리는 숨길 수 없다. 소리를 꾸며낼 수는 있지만 ‘호흡’은 숨길 수 없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 훈련 중에 나는 운명적인 그날을 맞이했다. 지금부터 나를 과거로부터 현재로 오게 해 준 그날의 훈련을 소개하겠다.
먼저, '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1. 폐 속에 있는 공기를 다 빼내어 폐를 쪼그라들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프-'하며 숨을 내쉰다. 안에 있는 모든 숨을 다 빼내야 한다.
2. 그 상태로 코와 입을 다 막는다. 그리고 숨이 너무 간절하게 필요할 때까지 참는다.
3. 이러다 죽겠다 싶을 직전에 코로만 공기를 들이마신다.
4. 아직 뱉으면 안 된다! 폐 속에 가득 찬 공기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숨을 진짜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하- 하며 숨을 내쉰다.
이게 다다. 너무 간단하지만 즉각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어떻게? '공기'와 '숨'으로.
나는 이때 처음으로 생명의 근원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당연하게 들이마시고 있던 공기와 숨이 매 순간 나를 살리고 있었다는 걸 이 훈련을 통해 그 존재감을 감각했다. 완전 실용적이지 않은가? 자, 숨을 느꼈다면 일어서보자. 이번에는 '중력'을 감각해 보는 거다. 아주 간단하다.
1. 두 발을 바닥에 딱 붙이고 선다.
2. 발바닥 전체로 바닥을 느끼며 천천히 걷는다. 뒤꿈치부터 중간바닥, 발가락까지 급하지 않게 모든 발바닥 면을 느낄 수 있도록 주의를 가져가보자.
이게 뭐냐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중력이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걸을 수 없다. 완전한 진실이다. 다시, 이 생각을 마음속으로 곱씹으며 한 걸음 한걸음 아주 천천히 내디뎌보자.
나는 이 날 이후로 현재를 살게 됐다. 믿어지기 힘들겠지만 너무 신비한 체험 같지만 사실이다. 과거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찾아오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감사함이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배우를 하면서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내일 뭐 하지'라는 생각으로 잠들고 깨던 일상이 10년, 기분이 좋은 상태로 눈을 뜰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숨을 쉬고 있는 것, 땅에 발이 붙어있는 느낌, 내가 살아있을 수 있도록 존재하는 근원의 힘을 느끼는 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도록 나를 붙들어준다. 너무 당연하지만 너무나 당연해서 넘겼던 곳에서 나는 현존을 얻었다.
실용성과 효율성을 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요즘시대에서 이런 움직임은 시간낭비로 보일 수 있다. ‘자유’를 얻는 것을 ‘디지털 노매드’로 인식할 만큼 삶을 미션을 통과하는 게임처럼 느껴지게 하는 세상이니까. 나는 현재에 머물지 못했을 때 세상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있는 삶, 임무를 달성하면 보상이 주어지는 삶, '자유'는 무언가를 이루고 나서야 가질 수 있는 왕관이 되어 미래 너머를 바라보는 삶은 행복까지도 보상 취급을 받았다. 행복은 현재에만 느낄 수 있는 '숨' 같은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은 역설적으로 불행을 가져온다. 현재를 살면서도 충분히 성실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정지우 작가님의 말처럼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면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숨’은 현재에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