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
2022년 8월 나는 불행했다.
'나 불행해.'
이만큼 절실하고 분명한 표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나의 불행에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완전히 지쳐가고 있었다. 20대에 바라던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감 속에서 실패감을 느끼며 나 자신을 미워하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었고 그동안의 노력이 헛된 것이라는 비난에 괴로워하며 자기검열에 스스로를 지치게 했고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만 요구하는 세상에 진절머리가 났다. 눈을 뜨면 무엇이 되기 위해 움직였고 눈을 감기 전에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만 할 뿐이었다.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스스로 베스트 셀러가 되길 바라며 깎아내는 삶을 살고 있던 것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저녁에도 노란 식탁등 아래 멍하니 앉아 불 꺼진 방 안의 칠흑 같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운명의 초대장이 도착한 순간이었다. 때로 인생의 전환점은 ‘평소’의 탈을 쓰고 찾아오는 것 같다. 자주 하던 제주도 엄마의 놀러 오라는 말이 그날따라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며칠 뒤 나는 정말로 비행기 안에 있었다. 계획 없이 비행기를 탄 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일한 계획은 제주살이를 시작한 친구를 만나는 일뿐이었다. 우리는 3년 만에 서귀포에서 재회했다. 고즈넉하고 낮은 상점들 사이로 비가 느리게 내리는 날이었다. 투명한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종달리’에서 다시 만난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관계들을 소개했다. 핸드메이드 파우치를 선물 받은 작은 상점은 모든 것이 '하나'처럼 보이는 신비한 곳이었다. 그녀가 끌고 간 모든 곳이 그러했다. 문고리부터 화장실에 걸린 바구니까지 주인장과 일체인 것 같은 곳이었다. 유행에 맞춰 진열된 물건이 아닌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선택된’ 물건처럼, 나에게는 없는 정체성이 얘한테는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느낌이 이상해져 갔다. 주근깨가 늘었다며 웃는 그녀의 얼굴에는 비비크림대신 생기가 덮고 있었다. 달라진 그녀의 모습은 피부색이 아닌 영혼이었다. 아름답고 빛이 났다. 나에게는 없는 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이 부드럽게 나를 누르는 기분이었다.
“너도 이곳을 좋아할 것 같아. 너와 잘 어울려.”
진정으로 인생의 변화를 일으키는 말은 성공한 사람이 전하는 화려하고 무게가 있는 비법이 아니라 마음에 울림을 일으키는 느낌이 드는 말 일뿐이다.
친구의 말은 새로운 나를 상상하게 했다. 성공이 있는 미래, 보상을 받고 인정을 받는 나와는 다른 내 모습 이었다. 창 밖으로 보이던 나무 아래를 걷는 나, 목적지 없이 걷기만 하는 내가 왠지 편안해 보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여서 그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 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에도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조건이 없는 행복, 가벼운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다. 내 안의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새로운 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했다. 제주도로 떠나보기로. 무엇이 되고자 사는 삶이 아닌 먼저 삶을 사는 일상을 살아봐 보기로 말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결정을 내린 뒤 약 20일 후에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이번에는 계획이 완전했다. '새로운 환경에 나를 떨어트려 보는 것' '모든 관계들과 멀어져보는 것' '익숙한 나를 떠나보는 것.' 도전과 결심이 있었다. 내 옆에는 짝꿍, 반려견 겨울이도 있었다. 이렇게 나의 첫, 홀로 하는 타지살이, 반려견과 떠나는 뚜벅이의 제주살이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