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3년 전 제주살이를 할 당시의 기록을 재편집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느새 저는 제주도에 와있습니다. 표선면입니다, 표선은 서귀포시에 안에 넓은 바다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표선에 온 지는 오늘이 3일째 되는 날이네요. 아, 나흘째예요. 어쩐지 꽤 익숙해졌다 했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빠르네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제주도에 온 소감부터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아주 평온합니다. 새벽 6:30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집니다.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커튼을 젖힙니다. 오늘은 어떤 하늘이 나를 놀라게 해 줄까 라는 기대가 절로 들거든요. 오늘 아침, 드디어 비가 그쳤습니다. 놓칠 수 없죠. 언제 다시 비가 올지 모르니까요. 눈곱을 붙인 채로 산책부터 나갔습니다. 겨울이 와 함께 동네의 냄새를 맡아요. 아직은 숙소 부근에서 어슬렁 거리지만 곧 태풍이 지나면 반경을 넓힐 작정입니다.
제주도에 내려오는 날이 생각나요.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 칠 김새가 보이지 않았어요. 비행기가 뜨지 않을까 주변의 걱정이 쏟아질 정도로 쏟아졌습니다. 저만 빼고요. 이럴 때는 무덤 한 성격이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아침까지 당근으로 나눔을 하고 그 전날에는 우체국으로 짐을 10박스나 날랐습니다. 1년 살기는 보통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이 정도는 가서 살까?' 하다가도 12000원 박스 하나에 채워질 물건을 생각하면 그게 안되더라고요. 미니멀리스트 실패인가요? 총 16박스를 보냈습니다. (우체국 배송기사님 감사합니다.)
* 4일 살아본 결과, 택배로 다 가지고 오세요! 다 챙겨 온 덕분에 정리함, 도구 정도만 구매했습니다. 심지어 쓰던 박스테이프까지도 유용하게 쓰게 됐다는 사실! 강아지 욕조부터 해먹까지- 겨울이불, 부피가 큰 것들은 박스를 겹쳐서 보낼 수 있어요. 여러분 택배로 모든 게 가능합니다!
마침내 서울집을 깔끔하게 비워내고 드디어 공항으로 출발합니다.
박스를 16개나 부치고도 캐리어의 무게는 총 35kg가 나왔고, 반려견 동반탑승에 케이지까지 쉽지 않은 대 이동입니다. 큰 캐리어만 화물로 부치고 작은 캐리어 위에 겨울이 케이지를 올려 이동했어요. 다행히도 제가 탄 비행기에 사람이 적어서 편하게 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 반려견동반 좌석이 따로 있는 거 아셨나요? 항공사 측에서 옆좌석을 블록처리 해주셨답니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도움을 받고 감사한 일이 많아지는 기분이에요. 케이지에 갇혀 큰 진동과 무서운 소리까지 지옥 같은 50분을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서 기다려준 겨울이에게도 너무 고마웠어요.
그렇게 비 내리는 2022년 8월 30일, 마침내 저는 서울을 떠납니다!!!!!
김포에서 제주까지 50분이 아니었던가요? 눈만 감았다 떴을 뿐인데 착륙준비를 하고 있네요. 허허허
하늘이 너무 맑아요. 이렇게 저를 반겨줍니다. 마치 하늘이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맑은 하늘이라니, 서울에 두고 온 보물이 있어도 깜빡 다 잊을 만큼의 기분이었어요. 누적된 피로가 싹 사라지는 약이 창문 밖에 있네요.
' 이 맛에 내가 제주를 왔지!'
비행기가 바퀴에 내렸을 때 느낌은 예상보다 훨씬 더 차분했습니다. 제각각의 제주살이를 하는 이유와 의미가 다르겠지만 제게는 '삶'이었기에 이제 시작이라는 실감이 무겁게 내려앉았나 봐요. 짐을 전부 보내고 비워진 서울집에 가만히 앉아있던 마지막 날엔 조금 겁이 났습니다. 태어나서 자의적으로 터전을 옮기는 것도 처음이고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실감이 나니 두려움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때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차로 옮긴 짐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쯤 택배가 도착했네요.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택배까지 정리할 게 산더미예요.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서울에서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불필요한 물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뿌듯합니다. 다이소에 가는 길이 행복합니다. 이곳이 너무 좋아요. 제주시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표선만의 정서가 저를 평온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다이소에 들렸다가 들어가던 길에 쓰레기봉투가 필요해서 집 앞의 편의점에 들렀습니다.
"종량제봉투 10리터 한 묶음 주세요."
"쓰레기봉투 안 팔아요."
"... 네?? 안 판다고요? 그럼 어디로 가야 하죠?"
충격적이었어요. 쓰레기봉투가 편의점에 없다니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 거죠? 쓰레기봉투를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요? 쓰레기봉투를 사러 하나로마트까지 가면서 순간 여기가 한국이 아닌 줄 알았어요. 편의점 주인분에 시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충격이 왔습니다. 바로 분리수거입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분리수거를 하는 곳이 빌라 단지 안에 없었어요. 어디에 물어봐야 할까요, 저는 길목에 서서 이 당혹스러움을 감추려고 노력하며 (이 동네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려 애쓰며) 길 가는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저기 죄송한데요.. 혹시 쓰레기 버리는 곳이 어디예요? 분리수거하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여기서 나가서 우측으로 쭉 가면 빨간 지붕집 있어요. 거기서 더 가면 버리는 곳 나올 거예요."
여행으로 다닐 때는 전혀 몰랐던 것들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예리한 감각이 깨어납니다.
'정신 차려! 너 이제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해. 너 완전 다른 곳에 온 거야!'
'이방인이 된 것 같아..'
여기 좀 보세요. 넓게 펼쳐진 하늘과 구름, 검은 돌이 바다와 맞닿아있는 이곳을 좀 보세요. 편의점에서 쓰레기봉투 좀 못 사면 어때요, 종이박스 들고 낑낑대며 5분을 걸어가면 또 어때요. 이 모든 불편함들을 단번에 잊을 만큼의 자연이 눈앞에 펼쳐져있는데요.
그리고 그 날밤, 지인이 떠나고 홀로 남겨진 밤이 찾아왔어요. 배가 고파서 먹을거리를 사러 나갔습니다. 저녁 7시밖에 안 됐는데 새벽 2시는 된 것 같은 이 어둠은 뭘까요. 눅눅한 바람과 칠흑 같은 길목에 완전히 압도당했습니다. 저녁 7시에 공포를 느껴 본 적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다 생각하며 씩씩한 척 편의점에서 계란과 겨울이 간식을 사서 겨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풀린 긴장감에 식욕을 잠시 제쳐두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눈물이 흘렀어요. 지금 나는 외롭고 무서워한다는 걸 눈물이 알려주듯 심장의 요동 없이 눈물이 먼저 나왔어요.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운다? 나 갑자기 눈물이 나. 나 왜 우는지 모르겠는데 눈물이 나. 나 외로운 것 같아. 맞아 나 외로워. 여기 어디야!~~!#$@$^%$&"
"하하하. 그걸 벌써 느꼈다고? 그거 외로움 맞아 외로움이야. 하하하"
친구는 이게 재밌나 봐요. 마치 신고식을 한바탕 당한 기분이었어요. 외로움에 울고 있는 내 눈물이 웃긴가 봐요. 저도 따라 웃었습니다. 한바탕 웃으며 외로움을 나누고 나니 반이 가벼워진 기분이었습니다. 외로움의 순도를 온몸이 느끼는 기분이었어요.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귀중한 감정이에요. 외로움을 그 자체로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옆에는 나만큼이나 낯선 환경에 외로워하는 반려견이 있었습니다. 겨울이를 안아줬어요. 체온이 따뜻했어요. 터전을 옮긴 건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도 이 정도의 불안감과 외로움, 피로감을 느끼는데 강아지도 알겠죠.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는 걸 보면 스트레스가 컸던 것 같아요. 월세 생활로 2년마다 이사를 하는 게 겨울이 게는 큰 스트레스 일거라 늘 미안했는데 이번에도 제 욕심으로 겨울이를 힘들 게 한 것 같기도 해서 미안했어요.
"불안정한 반려인을 만나 고생이 많다! 내가 더 잘할게."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낯선 밤을 지새웠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어디서나 잠을 잘 자는 편입니다. 고민이 있을 때도 웬만하면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주의예요. 살면서 불면증을 겪어본 일이 거의 없어요.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잘 잡니다. 어제는 외로움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꿈도 안 꾸고 푹 잤어요.
다음 날 아침 6:30, 벌떡 일어나 커튼을 젖힙니다. 마치 소풍날 날씨를 확인하는 애처럼요. 화창한 날씨에 미소가 나옵니다. 책을 읽고 운동복을 입었어요. 집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도 없이 방향도 모르는 채 걸었습니다. 막다른 길이 나오면 뒤를 돌아 다시 걸어가면 되니까요. 이 길에도 익숙함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것을 알기에 낯선 오늘을 충분히 즐깁니다. 아쉽지 않도록요. 발걸음으로 지도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표선에 있는 해수욕장은 썰물시 가장 넓은 백사장으로 유명해요. 넓은 모래사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해변도로를 달렸어요.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형용할 수 없는 자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내일도 모레도 한 달 뒤에도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아요.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어제의 두려움과 외로움은 다른 사람의 일인 듯이 지금 이 순간 너무 행복해 미치겠습니다. 이 아름다움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까요?
내일부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력한 태풍이 제주와 부산을 지난다고 합니다. 제주에 오자마자 맞이하는 강력한 역대급의 가을태풍은 제게 신고식을 예고했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아주, 몹시, 매우 겁을 먹은 상태라는 점 전해드리며 부디 모두에게 큰 피해가 없이 지나가기를 바랄게요.
2022. 9. 3.
2화 End.
창문에다 신문지.. 부쳐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