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7권 13.
네가 네 자신을 “지체”라고 말하지 않고 거기에서 한 글자를 바꾸어서 “부분”이라고 말한다면, 너는 아직은 너의 동족인 사람들을 진심으로 살아하는 것도 아니고, 선을 행하는 것을 그 자체로 기뻐하는 것도 아니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7권 13 중에서
어제 내 삶의 핵심 가치관 열 가지를 쓰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무려 4위에 “선함”이라는 가치관이 올라갔다.
독서와 글쓰기가 열 가지 안에서 하위권에 들어간 게 의외였다.
그렇게 쓰면서 알게 된 것은 내게 중요한 가치관은 읽고 쓰는 것 이전에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이었다.
선하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착하게 산다는 것과는 다르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착하게 행동하는 것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함은 같지 않다.
성인이 된 이후 나를 지탱해 준 정신적 요소가 이 “선함”이었고 이에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삶이 있고 글쓰기가 있다.
쓰는 대로 살아지기도 하지만 산만큼 쓸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은 그만큼 글쓰기 소재도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직장도 다니지 않고 만나는 사람도 많지 않아 경험 면에서는 부족하다.
하지만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과거에도 있지만 현재의 삶에 있다.
‘이런 삶을 살고 싶다.’ 느끼는 동시에 내가 책에서 받은 위로처럼 ‘이런 글을 쓰고 싶다.’ 느끼게 해 준 이해인 수녀님의 글은 정신적 중심축이 된다.
오늘의 문장에서 나를 이성적인 존재들로 구성된 하나의 ‘지체’라 보지 않고 ‘부분’이라 여긴다면 진심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선을 행할 때도 그 자체로 기뻐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의무일 뿐이라고 말한다.
삶이 아니면 글에 묻어 나올 수 없는 진실한 선함.
일상의 작은 것도 소중하고 감사하게 바라보면 내 일상과 글도 소중하고 감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