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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도 이유가 있는 법이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7권 41.

by 안현진

“신들이 나와 내 자녀들을 돌보지 않고 버려둔다면, 거기에도 이유가 있는 법이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7권 41.



아이들은 감기에 걸리고, 나는 배탈이 났다.

이틀 열이 오르내리던 막내는 열은 안 나지만 콧물이 계속 난다.

두 아들은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심상찮다.

점심때 라면 먹다가 배가 아파서 반을 버렸다.

그때 아팠던 여파가 지금도 남아 있다.

꼬르륵 소리는 나는데 섣불리 뭘 먹지 못하겠다.

여차했다간 또 탈이 날까 봐서다.

외투도 안 입고 놀러 다니던 아이들에게 잠바와 장갑을 더욱 챙기고, 따뜻한 물을 마시게 한다.

냉장고에 있는 귤도 많이 먹으라고 계속 꺼내온다.

나는 한동안 라면은 안 먹을 것 같다.

당연하게 누리던 것을 잃었을 때에야 소중함을 크게 느낀다.

요 몇 주, 끝이 갈라지고 끊어지는 머리에 스트레스받았다.

두 갈래, 세 갈래 갈라지고 끊기는 머리를 보는 건 몇 년 만이다.

가만히 못 두더니 건강한 머리를 상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울적했다.

당장 미용실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동생 결혼식을 앞두고 있어 자르지도 못한다.

한복에 단발머리는 안 어울리니까 머리를 자르더라도 결혼식 후가 시기적으로 맞다.

끝만 다듬고 오기엔 파마를 풀고 싶을까 봐, 그러면 또 손상이 갈까 봐 아예 발길을 안 하고 있다.

갈라진 머리가 보일 때마다 가위로 끝만 똑똑 잘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 해도 낫다.

머리, 이게 뭐라고.

이 일을 통해서도 느낀 게 있다.

머리가 길고 회복되는 동안 더는 신경 쓰지 말고 더 중요한 일에 마음을 두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머리끝이 상한 것도, 배탈이 난 것도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벌이 아니라 이유였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을 돌아보게 하려는 이유.

12월과 올해가 이틀 남았다.

이틀 동안 내 마음을 헤집어 놓는 일이 생기더라도 거기서 이유를 찾을 것이다.

벌을 받는 게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뭔가를 전하려는 이유를 찾는데 집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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