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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진 Apr 21. 2024

친숙하고도 덧없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9권 14.

이 모든 것들은 경험에 있어서는 이미 친숙한 것들이고, 시간적으로는 덧없는 것들이며, 질료적으로는 무가치한 것들이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 손으로 매장한 사람들이 살던 때에도 있었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9권 14.



"엄마, 배고파." 소리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간단히 아침을 챙겨준 뒤 책상 앞에 앉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지? 기침이 안 떨어져서? 늦게 일어나서? 밥 챙기기 귀찮아서? 애들 잘 못 챙겨주는 엄마 같아서? 오늘 써야 할 글이 막막해서?

전날 밤부터 갑갑하다.

망망대해에 혼자 표류하는 기분이다.

비가 와서 그러나.

아니다. 외부 상황은 상관이 없다.

내 마음의 문제다.

앙상하던 가지에 잎이 돋아나더니 이젠 초록 잎이 활짝 폈다.

초록 커튼이 드리워진 창밖을 멍하게 본다.

아이 교육, 글쓰기, 가정 경제 등으로 생각이 번져 나간다.

무언가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선우는 말과 행동에 상처를 잘 받는다.

내가 아이에게 화내고 소리치고 짜증 낸 모든 게 영향을 미쳤을까 봐, 혹여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뭔가를 계속했을까 봐 미안하고 걱정된다.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정서적 지지, 함께 하는 시간, 배려와 공감, 맛있는 밥, 가족의 사랑.

잘 키워보겠다는 마음으로 육아에 올인하던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데, 오히려 점점 커져가는데 왜 내 행동은 다른 걸까.


예전에 쓴 초고를 보는데 한숨이 나온다.

김은숙 작가가 재능이 없으면 치열하게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한 인터뷰를 봤다.

성공한 작가도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하고 있나.

1년 전에 쓴 글을 다시 읽어 본다.

처음부터 새로 써야겠다.

그래, 쓰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세 아이는 시끌벅적하다.

숨바꼭질을 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먹을 것을 챙겨주고, 먹은 것을 치우고, 아이 얘기를 들어주는 사이 막막하던 백지도 조금씩 채워 나간다.


외출하려는데 나만 챙기고 있지 않았다.

쓰던 글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조금만 있다 가자고 했다.

선우가 찾아와 모두 엄마만 기다리고 있단 말에 노트북을 덮었다.

도서관과 마트에 갔다가 집에 돌아왔다.

조금 쉬다가 다시 나가기로 했다.

얼른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소중하고, 글을 쓰는 시간도 소중하다.

오늘도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 환경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간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라 할지라도, 친숙하고도 덧없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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