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1권 30.
“너는 노예로 태어났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할 뿐이고 이유를 물어서는 안 된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1권 30.
이틀 폭우가 쏟아진 뒤 기온이 뚝 떨어졌다.
앞뒤 창문을 모두 열었더니 쌀랑하기까지 하다.
9월 끝 무렵, 이제야 가을이 왔다.
입맛 없어도 아침을 챙겨 먹고, 활력이 생기는 약도 챙겨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옷과 이불 빨래를 구분해 세탁기를 두 번 돌렸다.
남편과 아이들 운동화를 빨면서 화장실 청소도 간단하게 하고 씻고 나왔다.
베란다에 건조대를 펼쳐 빨래를 널었다.
운동화는 바깥 선반에 올려두었다.
옷은 바람에 살랑거리고, 운동화는 햇볕을 잔뜩 쐬고 있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다.
옆에 있던 은서는 언제 내려갔는지 바닥에서 책을 보고 있다.
사아악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뚜루루루 귀뚜라미 소리, 위이잉 공사 소리, 빵빵 차 소리, 부아앙 오토바이 소리, 우우웅 헬리콥터 소리, 딸랑딸랑 어느 집 현관 종소리가 들린다.
잠깐 시간이 멈춘 듯 멍하게 있었다.
은서가 말하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생리 첫날에는 잠이 쏟아진다.
너무 졸려서 잠깐만 엎드린다는 게 선우 침대에서 한 시간을 잤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더 이상 시원하지 않았다.
추워서 일어날 만큼 쌀쌀했다.
쌓아둔 빨래를 개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 마지막 팥빙수일 것 같다고 예전에 우리가 갔던 카페에서 왔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이 날씨에 팥빙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마트에 갔다.
반팔, 반바지를 입은 선우가 추워하며 이제 겨울이냐고 묻는다.
안 그래도 짧은 가을이 더 짧아지고 있다.
과자 하나 사갈까 물었는데 아이스크림을 고른다.
아이스크림 사서 나오는 길이 어색한 날씨다.
불과 며칠 사이 여름은 제 흔적을 지우고 다음 주자가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변하는 자연에 인간은 적응하며 살아간다.
지나가는 계절이 아쉬울 수는 있어도 원망스럽지는 않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생각하고 느끼는 이 이성과 감성에 있다.
오늘은 계절이 변하는 순간순간을 포착하고 느꼈던 하루였다.
바뀐 것이 계절뿐인지 내 마음속을 더 세밀히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