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순위가 1순위를 위협하지 않도록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2권 8.

by 안현진

네 자신의 불안의 원인은 네 자신 이외의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무도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라.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2권 8 중에서



나는 성능 딸리는 컴퓨터 같다.

이것저것 작업량을 많이 주면 과부하가 걸리고 멈춰 선다.

‘네 성능을 생각 못 하고 너무 많은 것을 줬구나.’

다시 작업량을 줄이고 이것만 제대로 돌아가면 좋겠다로 만족한다.

육아와 살림에 글쓰기를, 글쓰기에 육아와 살림을 얹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어느 쪽 하나 만족스럽지 않고 늘 타협해야 하는 마음이 양쪽 모두에게 미안했다.

거기다 한두 가지를 더하니 슬슬 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이것도 해야 하는데, 저것도 해야 하는데…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압박감을 느낀다.

좋아하는 일이어도 해야 한다는 프레임에 갇혀 버리면 무겁다.


고개를 돌리니 수북이 쌓여 있는 빨래가 보인다.

청소기도 밀고, 방도 한 번 닦아야 할 것 같다.

날씨가 추워졌으니 아이들 여름옷과 긴팔 옷 서랍칸도 교체해줘야 한다.

딸은 수시로 말을 걸고 책 읽어 달라고 가져온다.

읽고 써야 할 책과 정리할 글들은 언제 다 하지.

오후에는 은서랑 놀이터 가기로 했는데… 끝내고 나갈 수 있을까….

딸의 끼니와 간식을 챙기고, 얘기도 들으며 오늘도 백지와 마주 앉았다.

앉자마자 써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청소기가 다 돌아갔다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건조기와 건조대에 빨래를 넣고 널고 이번엔 이불을 돌렸다.


적고 보니 꽤 여러 가지를 처리하고 있는 것 같다.

해야 할 일만 생각하다 보니 불안하다.

내가 다 못 해낼까 봐 조급하다.

조급해지니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다.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게 아이다.

몇 입 더 먹은 후에 떼거나 자기가 벗겨도 될 텐데 고구마 껍질을 떼 달라한다.

나도 모르게 굳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껍질을 까준 뒤 “이제 엄마 이것 좀 할 게.” 했다가 딸과 설전이 오가고,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난리가 있었다.

살림, 육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1순위가 될 수는 없다.

언젠가는 육아가 2순위, 3순위로 밀려날 날도 오겠지만 아직까지는 1순위다.

자꾸 그걸 잊고서 2, 3순위가 1순위를 위협하게 둔다.

옆에서 혼자 책 보고 있는 딸에게 미안해서라도 힘을 내 본다.

아이가 있으면 삶의 모습도 우선순위도 달라진다.

그 시간을 잘 지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러면 된다.

아이와 놀이터 가기가 이처럼 중요하게 여겨질 날이 오래 남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자고 자꾸만 속으로 되뇐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마디 말에 다 담기는 인간의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