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MVP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2권 25.

by 안현진

너의 판단을 내던져 버려라. 그러면 너는 속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네가 너의 판단을 중지하고 내버리겠다는데, 누가 그것을 방해할 수 있겠느냐.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2권 25.



형제가 둘 다 방과 후 교실에서 축구를 배우고 있다.

시작은 윤우가 먼저였다.

2학년이 되어 시작한 축구에 푹 빠졌다.

축구 얘기만 하고, 축구 책만 관심 있게 보고, 일기에도 온통 축구 얘기였다.

그런 동생을 옆에서 지켜보던 선우도 축구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3학년 2학기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두 달 즈음되었다.

윤우가 확신의 공격수라면 선우는 수비수 쪽이었다.

골을 넣는 아이들은 앞으로 치고 나가는 달리기, 공을 뺏거나 빼앗기지 않는 기술, 공을 차는 힘이 다르다.

어릴 때일수록 골을 넣는 아이들이 환호를 많이 받고 친구들에게 인기 있다.

그래서인지 윤우와 선우 경기를 볼 때 내 마음도 다르다.


거의 매 경기 한 골씩 넣는 윤우는 골 넣는 것과 상관없이 마음 편하게 본다.

자신 있게 달려 나가서 골을 넣는 아들을 보면 멋있다.

세리머니도 잊지 않는 꼬맹이들이 귀여워 웃음이 나온다.

선우는 축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지만 열심히 뛰는 것에 비해 표가 안 나는 수비수에 가깝다.

축구 아카데미를 다니는 친구들도 꽤 있고, 4학년 형들과 함께 하니 그 틈에서 달리는 아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래도 축구를 재밌어하고, 엄마 아빠에게 보러 와 달라고 꼬박꼬박 얘기한다.

안 가려 하다가도 선우가 눈에 밟혀 앞 시간인 윤우부터 보고 있게 된다.

수업 후엔 아쉬운 점은 넣어두고 패스를 잘하더라, 잘 뛰더라, 빠르더라 하는 칭찬을 잊지 않았다.


오늘은 윤우가 축구를 보러 와주면 안 되냐고 말했다.

은서를 데리고 오후에 가니 벌써 경기 전반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특별한 날만 한다는 바경을 했다고 한다.

바경은 바로 경기를 한다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한 골을 넣고, 들어가지 못한 아쉬운 슛이 몇 차례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손 흔들어주던 녀석이 수업이 끝난 후엔 쌩하니 사라졌다.

조금 괘씸해하는 사이 선우 경기가 시작되었다.


운동장을 뛰던 아이가 어느새 골키퍼를 하고 있다.

전반전에 골키퍼가 선우까지 세 명 바뀌었다.

축구 경기를 볼 때 골대 앞에 홀로 서 있는 골키퍼가 외로워 보인다.

달려오는 선수들과 날아오는 공이 무섭진 않을까 생각하며 마음 졸인다.

그런데 선우가 혼자서 넓은 골대를 지키고 있다.

뛸 때보다 더욱 긴장하며 봤다.

두 골을 허용했지만 상대편의 프리킥을 연속으로 막아내고, 그 후에도 여러 골을 끝까지 막아냈다.

그 사이 선우네 팀은 5:5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경기가 끝난 후 선생님이 오늘 MVP는 선우라며 칭찬해 주셨다.

선우가 가방을 메고 우리에게 왔다.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칭찬도 많이 받고, 상대팀은 잘 막아서 힘들다는 얘길 하더라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선우 얘길 들으며 붕어빵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사 왔다.


선우는 축구가 재밌고,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기면서도 왜 아이가 운동장을 뛸 때 마음 졸였을까.

잘 뛰는 친구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는 않을까, 자신감을 잃지는 않을까…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오늘 선우 모습을 보니 너무 앞서서 아이를 판단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수비를 잘해, 공격을 잘해, 골을 잘 막아.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찍 한계를 그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선우가 골키퍼를 할 때 공을 잘 막아냈다는 것뿐만 아니라 열심히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날아오는 공을 끝까지 보고, 온몸으로 막아내는 모습에 더 칭찬해 주고 싶다.


오늘, 아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MVP는 최우수 선수에게 주는 상이다.

잘하고 싶다고 전부 잘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도 나도 내 인생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MVP가 되도록 노력할 수는 있다.

그러니 미리 이만큼만 할 수 있을 거라고 단정 짓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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