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붙잡은 현재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2권 26.

by 안현진

너의 자녀, 너의 육신, 너의 혼을 비롯해서 지금 네게 있는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왔으며, 모든 것은 너의 생각과 판단, 즉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고, 인간은 오직 현재의 순간만을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이 잃는 것도 오직 현재의 순간뿐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2권 26 중에서



의자에 머리를 기대어 잠깐 졸았다.

무거운 눈만큼 머리도 묵직하다.

멀리서 영어 CD 소리와 끼야우 하는 은서의 낑낑거림이 들려온다.

자는 것도 같고, 깨어 있는 것도 같은 이상한 시간이었다.

완전히 잠든 게 아니니 머릿속엔 온갖 생각들이 다 읽힌다.

어제 일찍 잤는데, 왜 이렇게 졸리지, 선우는 영어 듣기 하나, 은서는 무슨 소리를 내는 거지, 춥다, 방에 가서 눕고 싶다, 아파트 노래 중독성 있다, 빨래 개야 하는데, 저녁은 뭘 먹지….

15분가량 흐른 것 같다.

잠깐 졸았다고 눈 뜨니 개운하다.


듣기가 끝난 선우는 놀다 오겠다며 나갔다.

선우 방에서 들려오던 끼야우 소리가 멈췄다.

엇, 양치 안 했는데, 저렇게 잠들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아이들 방으로 갔다.

이불을 감싸 안고 눈만 껌뻑껌뻑 하고 있다.

뭐 하고 있냐고 다가가니 몸을 엎드려 얼굴을 숨긴다.

책상에서 졸기 전, 은서가 내게 올라오려다 프린트한 종이를 쓰러트렸다.

페이지 수도 표시해놓지 않아서 섞이면 곤란했다.

"안돼에에~! 은서어!" 부르는 소리에 삐져서 오빠 방으로 간 거였다.

누워서도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과 엎드려 있는 작은 엉덩이가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니 은서가 입으로 부웅 소리를 냈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장난치니 기분이 풀린 은서가 입을 가리고 다시 부웅 한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냐고 물으니 오빠랑 레고 했다고 한다.

오빠가 듣기하고 레고 하다가 나갔다기에 그럼 엄마한테 오지 왜 혼자 있었냐고 물었다.

“엄마가 미워서.”

왜 미웠냐는 말에 “엄마랑 놀려구 했는데….” 한다.

네 살 딸이 하는 말만 듣고 있어도 재밌다.

솔직하고 놀랍고 감동적인 말에 하루 동안 많이 웃는다.


따뜻하게 누워서 은서 책 읽어주려고 장판에 불을 올려두었다.

거실과 방에 모두 불을 끄니 어둡다.

침대 스탠드만 켜두고 책을 읽고 있는데 띠띠띠 누가 들어온다.

보던 책을 우리 얼굴에 엎어 자는 척을 했다.

수업 듣고 온 남편이 킥킥킥 웃으며 은서를 간지럽히고 책을 들춰본다.


현재의 순간을 글로 쓰는 지금도 이미 흘러간 시간, 과거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게 된다.

내가 졸던 시간도 꽤 먼 시간처럼 느껴진다.

같이 누워 있던 아이는 아빠에게 가서 종알종알 말을 하고, 나는 이번엔 누워서 깜빡깜빡 졸음에 빠진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그 시간을 붙잡는데 글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오늘 내가 붙잡은 현재는 나른한 오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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