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는다.
그와 동시에, 내 뒤로 덩치 큰 성인 남성 셋이 같은 박자로 따라 걷는다.
내가 좀 더 빠르게 걷는다.
그와 동시에, 내 뒤로 덩치 큰 성인 남성 셋이 좀 더 빠르게 따라 걷는다.
해외의 길목 한복판에서, 예기치 않게 그들과 나 사이의 경보 대회가 열렸다.
나는 탐정처럼 추리했다.
어째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내 뒤의 이들은 무엇 때문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쫓아오는가.
발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머릿속 태엽을 돌리기 시작했다.
머리 안에서 조립되어 가는 정보의 태엽들이 조금씩 움직이다가, 찰칵 소리와 함께 맞물렸다.
번뜩 깨달았다.
엥. 이거 혹시 인종차별?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여행 일행과 헤어져 혼자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일행과 나는 아침 일찍부터 관광지를 발에 불이 나게 돌아다녔다.
꾸준히 운동한 일행과는 다르게, 평소 운동을 등외시한 나는 녹다운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피곤함을 버티지 못하고, 먼저 숙소에 돌아가기로 하였다.
홀로 숙소로 돌아가며, 운동해야 하나 고심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고민만 하는 중이다.
여하튼, 나는 뾸뾸거리며 숙소로 가다가 우연히 땅을 봤다.
내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내 그림자의 뒤에 길쭉한 그림자 세 개가 붙어있었다.
내 왜소한 그림자를 압도할 크기의 그림자였다.
오 크다. 그림자의 크기에 감탄하며, 다시 운동에 대한 심오한 고민에 빠졌다.
잠시 관심이 나의 뒤에 있는 그림자에 쏠린 사이에, 나는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앗. 여기가 아닌가. 속으로 탄식을 외쳤다.
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길거리의 변두리에 서서, 핸드폰으로 지도를 검색했다.
햇살이 뜨거운 날이었기에, 본능적으로 그늘 밑으로 들어가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앞을 본 순간, 내 앞에 덩치 큰 서양인 3명이 서 있었다.
단숨에 그들이 내 그림자와 겹쳐 있던 그림자의 주인이란 것을 눈치챘다.
그들의 날카로운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6개의 눈과, 나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확실해졌다.
이들은 나를 따라오고 있다.
목적지를 확인하고 발을 내딛자, 그들도 동시에 움직였다.
이제 그들은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걷는 소리와 그들의 걷는 소리가 겹쳐졌다.
그 상황에서 두려움보다도, 얼떨떨함이 먼저 몰려왔다.
인종 차별이라는 단어.
대부분의 인생을 국내에서만 살았던 나이기에, 그 단어는 희미한 안개와 같았다.
그럼에도 인종 차별에 대해 본 것과 들은 것이 내 안에 있었기에,
나는 인종 차별에 대해 이해한 상태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크나 큰 오산이었다. 실상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다르다는 이유로 받는 괴롭힘.
괴롭힘 자체도 상처를 주지만, 그 괴롭힘의 이유 또한 또 다른 상처가 된다.
그 사실을 그들의 시선을 통해 온몸으로 느꼈다.
그들의 눈빛은 내 존재 자체를 문제 삼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신기했다.
막연히 소식으로만 접하던 일이 내게 닥쳤다는 현실감 없는 충격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심장을 달래며 내게 최면을 걸었다.
이미 인종 차별을 당하고 있으니, 이 또한 경험으로 남기자.
그런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그 마음가짐 덕에 이렇게 그 경험을 글로 쓰고 있기도 하다.
마음을 굳세게 다잡고 숙소를 향해 나아갔다.
내 뒤에서 따라오던 이들은 키긱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내 뒤를 따라오는 세 명 중 하나가 비웃듯이 "무쪄? 무쪄?"라고 내뱉었다.
낯선 억양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무서워?"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어쩌면,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아차리고, 한국말을 사용하는 건가.
평소였다면 그런 상대의 눈썰미에 칭찬을 보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뜩 궁금해졌다.
언제까지 쫓아올까?
그 상황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저항하기로 했다.
나는 리듬감 있게 걸었다.
알레그로(빠르게).
다음은 안단테(느리게).
그다음 속도는, 모데라토(보통 빠르게)
그렇게 리듬감을 주며, 들쑥날쑥 걷기 시작했다.
내 뒤를 쫓아오는 무리도, 꽤나 리듬에 재능이 있었다.
내 걸음걸이의 지휘에 맞춰,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했다.
그들과 나의 리듬 맞추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들과 나는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과 나의 기묘한 여정(?)은 십여분 동안 지속되었다.
길거리에서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풍채 있고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힐끔 바라보고, 내 뒤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눈을 돌렸다.
누군가의 시선이 곱게 느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시선을 땅바닥에 두고 걸어갔다.
몸을 움츠린 채로, 그의 옆을 슬그머니 스쳐갔다.
내가 지나가자, 벽에 붙어 서있던 그가 슬며시 몸을 움직였다.
뭐지. 나는 순간 움찔했다. 내 뒤에 있는 사람 때문에 의심이 커진 상태였기에.
그는 나를 지나치고 내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내 뒤의 사람들을 붙잡고 말을 뱉어냈다.
그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나는 뒤를 돌아볼 자신은 없어, 내 왼쪽 벽 유리로 비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찡그린 표정으로 그 무리에게 무언가를 토로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언어를 알았더라면, 그들의 대화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벽에 기대어 있던 사람이 나를 도와주었다.
그는 내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들을 떼어내 주었다.
본인이 나서서, 그들을 제지했다.
나의 원치 않았던 경보 대회는 한 사람의 도움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별 탈 없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그날의 그림자보다, 낯선 이의 온기가 더 오래 내 안에 남았다.
그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 순간의 기억이 조금이나마 밝게 기억되고 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낯선 곳에서조차, 우리는 뜻밖의 온기를 마주할 수 있다.
삶의 길 위에서, 우리는 수많은 것들과 마주한다.
누군가의 위협을 마주칠 수도,
누군가의 작은 온기를 마주칠 수도 있다.
무엇을 마주칠지는 마주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불가항력이다.
하지만 위협과 온기 중,
무엇을 내 안에 담을지는 내가 고를 수 있다.
나는 그 여행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안에 담았다.
그 여행은 불쾌함으로 남지 않았다.
낯선 이가 건네준 작은 온기가, 지금도 내 기억 속을 따뜻하게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