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임금님이 될 순 없을까

by 아니아즈



'차라리 벌거벗은 임금님이 될 순 없을까.'



친구가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상황 속에서, 그런 잡다한 생각이 머리를 뾸뾸거리며 지나다녔다.

모든 상황은 ‘옷’이라는 짧고도 짧은 한 단어에서 야기되었다.


친구를 만나기 며칠 전, 나는 옷을 구매하였다.

그 옷은, 장차 3시간의 고심 끝에 내린 나의 답이었다.

심혈을 기울인 끝에서 도달한 답엔 의구심이란 한 줌도 없었기에, 단숨에 구매 버튼을 눌렀다.

이틀 뒤에 택배가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새 옷을 입은 후 들뜬 마음을 한가득 껴안고 약속에 나갔다.


처음 보는 옷인데, 라는 친구의 물음에, 며칠 전에 산 새 옷인데 잘 어울리지 않냐고, 넌지시 자랑했다.

친구는 내 옷을 한번 전체적으로 둘러본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입을 들썩이며 한참을 고민했다.

이내 맘을 다잡은 모양이었는지, 나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옷이란 건 말이지, 그렇게 입는 게 아니야.”


그 말을 시작으로, 친구의 입에서 꼬리에 꼬리를 문 열차처럼 말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첫째, 하나의 톤으로 옷을 입는다면, 밋밋할 수 있으니, 밖은 하나의 톤으로 입되, 그 안은 상반되는 계열로 입어라.

둘째, 다수의 색을 혼용해서 입는 것은 과하니 절제해야 함을 항상 기억해 두어라.

무채색에다가 추가로 하나에서 두 개. 그 이상은 과해 보일 수 있다.

셋째, 디테일도 중요하다. 양말. 양말이 흔히 무시하기 십상이다.

항상 마무리는, 이런 디테일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등등.


태풍처럼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말들에, 나는 홀딱 젖어 정신을 쉬이 찾을 수 없었다.

옷 하나 입는데 이런 세심한 이론들을 오밀조밀 따져야 한다는 그의 말들은, 내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들려왔다.

그 상황 속에서 내 머리를 가득 메운 존재는, 벌거벗은 임금님은 사실 누구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이야기를 돌이켜보자.


임금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옷을 원했고,

재단사들은 아름답지만 구제불능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옷을 만들어서 임금에게 헌상했다.

사람들의 눈에 그 옷은 보이지 않는다.

재단사들이 거짓말로 옷을 만들었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 반문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옷’이 존재한다고 믿는 순간부터, 그 ‘옷’은 그곳에 실재하는 것이다.


이 ‘옷’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자.

그를 위해,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겠다.

다음 글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면 된다.



.


이 글자는 무엇인가.



아마 다들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다. ‘옷’이라고. 아주 정확한 말이다.

이 글자를, 고개를 좌로 90도 돌려서 바라보아도, 우로 90도 돌려서 바라보아도,

‘옷’. 그 한마디로 이 단어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전과 같이, 다음 글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면 된다.





이 글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색깔을 입혔다곤 하지만, 이 글자 또한 ‘옷’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색을 입혀도 ‘옷’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 경우는 어떨까.



(옷)



이전 경우보다 다채롭게 색깔을 입혔다. 무려 빨강, 검정, 파랑 3가지의 색을 입혀주었다.

그럼 다른 글자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여전히 ‘옷’은 ‘옷’이라고 답할 것이다.

‘옷’에 색을 칠해주었지만, 그 본질은 바뀌지 않고 ‘옷’ 그대로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얘기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속 ‘옷’ 또한 바뀌지 않았다. 분명,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은 없다.

바뀐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다.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고, 그 존재가 규정되었다.

옷은 그대로였지만, 사람이 그 옷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그 옷의 존재가 바뀌었다.

존재가 바뀐 옷은, 그 옷을 입은 사람에게도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벌거벗은 임금님은 누구보다 행복했을지 모른다.

일단 최우선으로 어떤 한 인물과 달리, 옷에 대한 잔소리를 일체로 듣지 않는다.

그리고 옷을 입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입었다고 생각해준다.

사람들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옷이 자신의 눈앞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임금은 항상 맨몸으로 밖을 나가도 되며, 이는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할 필요 또한 없다는 얘기가 된다.

왜냐 그의 맨몸 상태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상태이며, 누구보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옷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 해주기에.


의미가 부여된 옷은 사람을 바꾸어 주고, 이런 의미가 부여된 옷들을 사람들은 갈구하고 탐한다.

사람들은 혈안이 되어 옷을 찾고, 옷을 입고자 한다.

옷의 형태는 다양하고, 여러 형태의 옷들로 사람은 자신을 꾸민다.


'돈'이란 옷을 자신에게 입힌다.

'명예'란 옷을 자신에게 입힌다.

'지위'란 옷을 자신에게 입힌다.


서로가 입고 있는 옷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파악한다.

사람들은 서로의 옷을 탐하고, 서로의 옷을 부러워 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많은 옷을 껴입으려 하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껴입은 옷이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사람이 옷을 입고 있은 걸까.

아니면, 옷이 사람을 입고 있고 있는 걸까.



태초에 우리에게 옷은 없었다.

사람은 맨몸으로 태어난다. 현재뿐 아니라, 과거도 그러하였다.

아담과 이브 또한 나뭇잎 한 조각 정도를 걸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맨몸으로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옷을 갈구한다.

옷을 입고 다니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옷을 입고 다니지 않으면 공공음란죄로 잡혀간다.

반대로 가치가 높은 옷을 입는다면, 그 사람의 가치를 높여주기도 하며, 어떤 옷은 그 사람의 계급 또한 올려주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사람은 맨몸으로 와서, 옷을 입고 돌아가야만 한다.

옷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고도 고차원적인 존재다.

난 친구의 열 띤 강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옷에 대해 알다가도 잘 모르겠다.

어떤 이론이 존재하고. 어떤 이론이 중요하다, 에 대해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지금 머리에 떠오르는 건, 단 둘뿐이다.


첫째는, 그냥 벌거벗은 임금님의 세상이 올 순 없을까, 라는 생각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다닌다는 것에 부끄러울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맨몸으로 태어났을뿐더러, 옷이란 건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인 존재인데 말이다.


둘째는, 나도 친구와 다를 바가 없는, 옷에 대한 이론을 줄줄이 늘어놓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이전 24화죽음을 두려워한 한 아이의 몸부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