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코코에서 보여지는, 죽음에 대한 설정
*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
이 이름을 읊조리며, 코코는 그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했다.
코코는 주름이 곱게 진, 백발을 귀엽게 땋아 내린 할머니 이름이고, 헥터가 내내 그리워하는 딸이다. 동그란 얼굴의 뮤지션 소년의 이름은 미겔이다. 코코와 미겔은 둘 다 귀엽고, 음악과 헥터를 좋아한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도 죽음이 있다. 코코를 보기 전에 적은 글, 너도 나도 코코에서 소개했던, 사후세계에 관한 멕시코 애니메이션을 보아도 그런 얘긴 없었다. 내가 지식이 부족한 걸까, 디즈니/픽사에서 가족을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한 걸까. 애니메이션이란 지식을 얻는 데 있어 항상 최적의 매체는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항상 새로운 것을 더 알게 하고 싶어 하는 촉매 역할로 충분한 것 같다. 멕시코의 문화에 대해서 충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의 죽음. 그것은 지상의 살아있는 모든 이로부터 잊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코코에 따르면, 그 죽은 자들의 죽음은 어떤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죽음처럼, 그들도 잊혀지는 시간을 어떻게든 늦춰보러고 애쓴다.
이쯤 되니 뭔가 속은 기분이 들었다. 죽은 뒤에도 신나는 세상이 있고, 그곳에서 고통과 죽음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애니메이션 속에서라도 그들은 평화롭게 설정해 줄 수 없었던 걸까. 내가 그들에게 부여하고 싶은 죽음이 아니라며 조금 억울해하고 말았다.
어쩌면 애니메이션 코코에서는 죽은 자들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즉, 죽음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삶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생각해본다. 그것이 멕시코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과 꼭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후의 새로운 삶이든 죽음이든, 죽음이 없어야만 반드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에서 보더라도, 언젠가 어떻게든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나고, 사랑하는 이가 없는 사람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름의 즐거움과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오늘은 울먹여도 내일은 웃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더라도, 죽음은 극복의 대상이 아닐지라도, 그 두려움을 잊고 다시 살게끔 하는 것은 어쩌면 즐거웠던 때의 기억이라는 의미를 코코는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