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좋아합니다. 정말로?

#차 tea

by anica

고등학교 때 오설록 티백 세트를 선물 받은 적 있다. 전체 박스부터 각 티백이 들어있는 패키지까지 귀여운 일러스트가 가득했다. 차라고는 동서 현미녹차밖에 마셔본 적이 없었지만 설렘을 주는 첫인상이었다. 티백이 든 봉지를 열자 맛있는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당시에는 새로웠던 삼각뿔 형태의 티백도 인상적이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따뜻한 물을 준비하고, 설명서에 적힌 시간에 맞춰 차를 우려냈다. 한 모금 홀짝.

웩!

분명 입안에도 달콤한 향이 남아 있는데 실제 맛은 전혀 달지 않았다! 패키지에 적혀 있는 차 설명을 하나하나 읽어보며 '달다'는 표현이 있는 걸로 다시 도전해 보았지만 여전히 향기로운 물에 인지 부조화가 왔다. 구체적인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충격만큼은 선명하다. 그 이후 10년 정도 차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가족 중에도 차를 즐기는 사람이 없었기에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해야 할까. 차 티백 세트는 가장 난감한 선물 중 하나였는데, 결국 다시 누군가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차와 다시 마주한 건 마을에서 점심을 먹게 되면서였다. 목요일 식사가 끝나면 다도 세트를 꺼내 차를 내려주시는 분이 계셨고, 모두가 식후 티타임을 즐겁게 맞이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 식은땀을 흘렸다. 배도 부른데 과연 마실 수 있을까? 안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나? 낯가림에 별다른 반응도 하지 못하고 한 모금 들이켰다.

썼다. 약처럼 쓴 건 아니니 쌉싸름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떫은 느낌도 있었다. 10년 전 처음 맛본 차(가향차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만큼 못 먹을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왜 마시는지는 모를 맛이었다. 한 잔은 정이 없어 보이니 두세 잔 정도는 마셨던 것 같다. 그렇게 목요일의 티타임은 계속되었다. 어느덧 권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찻주전자에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맛이 싫지는 않아졌다.


지금은 집에 조그맣지만 차 구역이 있을 정도다. 예전만큼 단 걸 못 먹게 되기도 했고, 커피와 액상과당을 피하다 보니 음료 선택지가 별로 없어 차 맛에 강제로 길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차를 좋아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차 자체보다는 차를 즐기는 내 모습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아직 또래에게는 드문 취미이기도 하고, 차를 이것저것 사기 시작한 것도 즐겨보는 유튜버가 자주 마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였던 것 아닌가? 정말 차를 좋아하는 걸까 의문이 든다.

다도나 차에 대해 공부해보지도 않았다. 무엇이 좋은 차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게 전부다. 그래서인지 정석 스타일로 차를 마신 날은 많지 않다. 또 겨울보다 여름에 차를 더 많이 마시는데, 더운 날에는 맹물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밤새 냉침해두고 물 대용으로 마시는 경우가 많다. 이런 와중에 잎 차를 그렇게 사고 싶어 한다. 찻잎 우리는 도구도 마땅히 없으면서 말이다. 요상한 차 생활이지만 나름 나만의 차 기준을 쌓아가는 과정이라 부를 거다. 내 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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