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이식 슬리퍼
볼펜, 각종 비상약, 모기 패치, 휴지, 물티슈, 보조배터리, 가글, 명함지갑 등등. 외출 가방 안에는 물건이 가득하다. 짐이 많아서 번잡하고 무거워서 힘들어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 뺄 수가 없다. 매일은 아니어도 한 번씩은 꼭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가방을 챙길 때마다 '가져가지 말까?' 고민하지만 결국 '아냐, 이거 하나 뭔 큰 차이라고 다 가져가자'라는 똑같은 결말로 이어진다.
일상에서는 혹시 몰라 병이 어느 정도 감당이 되지만, 문제는 여행이다. 말로는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인데 필요하면 사면 되지'를 외치지만, 눈과 손은 혹시 필요할지도 모를 물건을 계속 스캔하고 있다. 그런 나를 알기에 올해 초 오랜만에 멀리 해외여행을 준비하면서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애썼다. 체력을 고려해 캐리어는 24인치가 최대였는데 겨울옷 일주일 치만 해도 이미 반 이상이기에 경량 아이템을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었다.
그때 만난 게 여행용 접이식 슬리퍼였다. 평소에는 납작한 고무판으로 보관하다가, 발등을 덮는 끈 부분을 들어 올려 버클을 끼우면 슬리퍼가 된다. 장시간 외출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숙소 안에서 움직이거나 밤에 잠깐 편의점을 갈 때는 충분하다. 일반 슬리퍼는 밑창이 두껍고 발등 덮개 부분이 높아 두 짝을 포개도 부피가 꽤 되는데, 이 녀석은 2cm도 채 되지 않는다. 부피와 무게 면에서 압승이다. 여행용 제품에 만족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건 예외였다. 휴대용 목베개, 미니 세면도구 등 휴대용 물품을 여러 가지 사봤지만 두 번 쓰는 일이 없었다. 첫 개시만 하고 결국 안 쓰게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아름다운가게 등에 기부하거나, 그마저도 안 되면 버렸다.
여행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만 쓰는 물건들은 내 일상에 스며들지 못했다. 내 물건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으니 여행 물품만 따로 모아둔 수납함에 넣어두게 되고, 그러다 보니 눈에 띄지 않아 잊히고 잊힌 채 다시는 쓰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망각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런데 얘는 다르다. 여행 때만 쓰지만 내 물건 같다. 신발장 한쪽에 보관하면서도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매번 꺼낼 때마다 "또 쓸 일이 생겼구나"하는 반가움이 있다.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신발장 어둠으로 들어가지만, 여행 짐을 쌀 때면 언제나 제일 먼저 꺼내게 된다. 자주 쓰지 않아도,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아도 마음이 간다. 내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