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일기장
일기를 쓰는 타입은 아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생각나서 적는다고 해도, 특별한 이벤트가 있던 날의 하루 일과표를 서술형으로 풀어둔 형태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하면서 캘린더를 관리하고 업무리스트를 쓰기 시작한 뒤로는 더욱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감정이나 에피소드에 집중해 일기를 쓰기도 한다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내가 쓴다면 아마 그 에피소드가 발생하게 된 배경을 0부터 나열하고 있을 테지. 글을 써보자 했던 것도 하나의 주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마지막으로 일기를 꾸준히 썼던 건 초등학생 때였다. 학교 숙제였고 검사를 했기 때문! 억지로 억지로 해치웠던 일기가 쌓여 지금은 소중한 추억의 매개가 되었다. 두 달 전 이사를 앞두고 본가에서 그때 쓴 일기장을 모두 챙겨왔다. 그저 내 물건을 다 가져오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낡은 종이 속 이야기는 단순히 '내 물건'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보면 참 사소한 일을 큰일처럼 그날의 주제로 쓴 날을 보면 웃음이 나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이름이나 장소를 마주하면 반갑고, 맞춤법과 주술 관계가 맞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앞뒤 문장의 연결점을 알 수 없는 전개까지 총집한 글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물론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기라서 이 모든 게 귀엽긴 하다. 그때의 일기가 뭐가 재미있겠나 싶었지만 한두 장 넘기다 보니 버리지 않고 고이 보관해 주신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일기장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며 20년 전의 일기를 찾아보았다. 2005년 10월 17일. 아쉽게도 10월 13일부터 19일까지의 기록은 없었다. 17일을 향해 가며 10~11월의 일기를 훑어보았는데, 두 달 전 일기장을 볼 때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2005년이면 초등학교 4학년이니까 고학년 되었다고 대충 썼나? 기준이었던 줄 수를 채우려고 퀴즈 내기, 독후감 쓰기, 그림일기 쓰기 등 온갖 꼼수가 보여 그런 날들은 읽지 않고 건너뛰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감정'이다. 저학년 때의 일기는 감정을 있는 대로 표현했다. '동생이 이래서 밉다', '엄마가 그렇게 해서 속상하다', '무언가를 해서 좋다'와 같이 감정이 중심이고 그렇게 느낀 배경과 사건, 그에 관한 생각을 덧붙였다. 그런데 4학년 2학기의 일기부터는 지금의 나처럼 이벤트 나열이나 특정 주제에 관한 서술 형식이 꽤 많아져 있었다.
내가 아닌 느낌이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 대한 감정을 가감 없이 써놓다니. 선생님이 일기를 검사하는 걸 알면서 어찌 저리 솔직할 수 있었나 싶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이 내 생각과 감정을 아는 것이 무섭거나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람은 커가면서 자신에게 가장 솔직하지 못하다더니, 나도 1년 사이에 그렇게 컸었나 보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건 어린 시절의 순수함뿐만이 아니었다. 감정 표현에 서툴다는 건, 밖으로 꺼내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보여줄 나의 진짜 목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