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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May 16. 2018

여권 2

요구르트와 공산주의와 수도원. 불가리아

밤에 탄 버스는 국경을 넘어 새벽 아침, 나를 불가리아의 소피아에 내려 주었다.

사실 어떤 이들에겐 생소한 여행지 일지라도, 막상 그곳에 가보면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와 있으며 한국인 여행자도 종종 볼 수 있다. 투어나 짧은 일정의 관광을 하는 사람들의 동선이 닿지 않아 아직 한국에 유명하지 않을 뿐. 불가리아 역시 그랬다.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이 나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여행 당시 간 폴리트비체는 이젠 한국에도 완전 유명of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세계에서 최고의 호스텔에 랭크됐다는 숙소는 이미 풀 부킹 상태였고 그 숙소에서 추천해준 다른 호스텔을 찾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고 또 걸었다. 처음 버스에서 내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서늘함이었다. 아무리 아침이라지만 여름 날씨가 이렇게 쌀쌀한가? 이스탄불에서는 버스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검은색 플립플랍이 녹을 정도로 강렬한 더위를 느꼈는데 국경 하나 넘었다고 이렇게나 온도가 달라지다니. 나는 더위에 강하고 추위엔 약한 체질인데, 공기를 들이마시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결에 버스에 얇은 점퍼를 두고 내렸다. 학교 행사용 점퍼라 버릴 작정으로 가져왔지만 지금은 그 겉옷 하나가 절실했다.


아, 옷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내가 이 여행을 떠나기 전 아일랜드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친구에게 드레스코드에 대해 물었었다. 그 친구가 말하길 유럽 사람들은 전혀 패션에 신경 쓰지 않으므로 버릴 옷만 가져가라고 했다. 입고 거기서 다 버리고 가볍게 오라고. (나중에 아일랜드도 갔지만, 일반화의 오류임을 절실히 깨달음) 그래서 가져간 옷이 말 그대로 '후줄근한' 옷들. 농활 티셔츠, 축제 티셔츠, 과 티셔츠, 만 원짜리 후드티, 선거 때 입던 선본 점퍼.. 망할.

그녀와 내가 간과한 것은 그녀는 거기 잠시 '살았던' 사람이고, 나는 젊은이들이 한창 국경을 넘어 젊음을 과시하며 현장을 아주 쓸어 담는, 핫하다 못해 폭발할 정도의 열기를 발산하며 곳곳을 누비는 여름 방학 시즌에, 백패커들의 여행지를 골라서 간다는 것이었다. 그 말인즉슨, 호스텔에서 묵는 젊은이들이라도 비키니부터 핫팬츠, 원피스와 멋진 선글라스까지 아주 다국적 패셔너블의 현장에 내가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초라하고 초라하다 못해 쭈글이가 되었다. 이때 얻은 교훈은 어떤 곳을 여행하더라도 갖춰 입을 한 벌은 필요하다는 것. 몇 년 후 방콕 여행에서 만난 감탄사 연발의 소녀, 혼자 용감하게 인도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는 '성은'이도 같은 말을 했다. 언니 너무 후회돼요.. 담 여행엔 속옷도, 옷도 괜찮은 거 몇 개 가져와야겠어요. 흰 속옷을 히말라야 비누로 빨아서 초록색으로 물들었는데 빨래 널 때마다 너무 창피했어요..ㅜㅜ 현지인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이쁘게 보이고 싶을 때 입을 옷도 없고..


그래 그맘 언니가 이해해. 나도 첫 배낭여행 때 느꼈던 감정이란다 ㅎㅎ

유럽연합 소속국들의 도장은 이렇게 귀엽다. 왼쪽 상단엔 국가명, 하단엔 출,입 표시, 오른쪽 상단엔 출입국 수단.


소피아의 거리를 걸으면서 느낀 당황스러운 점은 "Sex shop"이라고 써진 많은 간판들이었는데, 알고 보니 성매매 업소는 아니었고, 우리나라로 치면 클럽과 비슷한 분위기의 바에서 술이나 음료 한 병을 시키고 댄서들의 쇼를 구경하는 관광장소이자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였다. 이때만 해도 어리고 소심했던 나는 흥미도 없고 (거짓말) 혼자는 괜히 이상하게 보여 위험할 것 같아 가지 않았는다. (물론 지금 다시 간다면 무조건 갈 것!!) 여행이 내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 있다면 혼자 하는 것의 편리함과 유용성을 알게 하여, 남들의 따가운 눈치 보다 혼자로서 누리는 편익을 우선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때만 해도 (사진을 보니 2008년이다) 혼자 밥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 때였다.


소피아에서 호스텔을 찾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걸었는데,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은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이 주소였다. 간판도 없다. 근데 들어가 보니 진짜 호스텔이다. 걷는 동안 해가 뜨고 날이 밝았는데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뭐랄까.. 공산주의가 이런 건가? 싶은 느낌. 음울하고 약간 뭐라 해야 할까. 인위적으로 낡음을 재생하지 않아 방치되었으며, 활기 없는 느낌. 거리에 사람은 있다. 아니 많다. 이쁜 성당들도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도시 전체가 응달 속에 있는, 무언가 안개가 낮게 깔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불가리아 역시 러시아와 비슷하 길을 걸어온, 키릴 문자를 쓰는 한때 공산주의 국가였다. 이때 강렬하게 느꼈다. 아 직접 보고 느끼며 배운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좋다..



소피아에서는 특별히 한 것이 없다. 그저 이스탄불의 일들과, 야간 버스를 타며 쌓인 피로 때문에 좀 쉬고 싶었다. 이스탄불보다 물가가 싸서 정말 잘 먹고 잘 쉬었다. 호스텔에 매년 오신다는 주인 언니의 양아버지이자 퇴임한 교수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간다는 나를 데리고 소피아 투어를 시켜 주었고, 이스탄불에서 같이 온 일행인 (같이 왔다기보다 쇼우코와 한국 오빠의 동선에 내가 따라붙은 것) 쇼우코가 세컨핸드 샵에서 리바이스 청바지를 3레바였나.. 아무튼 엄청 싸게 득템 한 것이, 사람이 있으면 차가 무조건 멈춰 서므로 길을 다니기 편했던 것과 같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 기억난다. 아, 종일 차를 타고 가서 랄리 모나스트리를 구경하고 다시 종일 차를 타고 돌아온 것도. 랄리 수도원의 높고 푸른, 생전 처음 본 하늘의 색감과 특이하고 아름다웠던 수도원의 페인팅. 그리고 이 수도원이 기독교의 한 갈래라는 건 알겠는데, 무슨 종교인지 모르겠어서 한참을 관리자에게 물어봤던 것. 올토독스? 올쏘독? 그게 뭐지 혼란스러워하면서. (이때만 해도 나는 성당, 교회 두 종류의 기독교만 존재하는 줄 알던 바보였다) 나중에 여행을 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됐는데, 이 종교는 동유럽과 중부 유럽까지 관통하는 굉장히 대중적인 종교이고 성당의 디자인은 알록달록 화려한 느낌이 많아 외관 만으로 알아보기 쉽다. 방향은 다르지만 성호를 긋고 수도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보다 천주교에 가깝고,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의 교회 같은 방식의 종교는 유럽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래도 역사와 환경이 많은 차이를 만들었겠지, 짐작만 할 뿐.

랄리 모나스트리. 하늘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낯선 느낌으로 아름답다. 너무나 쨍! 하다




다음으로 이동한 벨리코 타르노브에서는 다행히 소피아의 숙소 체인점인 유명한 숙소 예약에 성공했다. 유럽여행을 다니며 느낀 것은 예약은 정말 필수라는 점. 안 하면 서비스 이용이 아예 불가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더 많다는 의미는 최소 몇 배를 뜻한다.)


편안한 숙소와 벨리코 타르노브는.. 너무 아름다웠다.

밤이 되면 언덕의 성당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던 빛과 조명의 향연은 날 숙연하게 만들었고, 웬일인지 이 숙소엔 한국인이 많아 심적으로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게스트북 (숙소나 가게의 방명록인데, 그곳에서의 경험이 좋으면 쓰고 간다) 에는 반가운 한글도 있었는데, 전직 정수기 회사 직원이라는 여행자는 머리를 감아보면 물이 좋은지 바로 알 수 있는데 여기 물은 진짜라며 꼭 머리 감아보고 맨 물로 샤워를 해보라는 아주 유용한 정보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가끔씩 일어나는, 깊은 우연의 작용 이겠지만 당시에는 기절초풍할 일을 목격했는데 그곳에 머물던 세계 여행 중인 커플과 쇼우코가 이미 아는 사이였다는 것! 우연히 이 숙소에서 해가 바뀐 후 다시 만나게 된 거였다. 이들은 이미 이집트에서 만나 잠깐의 여행을 함께 한 사이였고, 시간이 흘러 이렇게 우연히, 다른 대륙의 다른 장소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배낭 여행자들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종종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있는데, 긴 여행의 길에 그런 우연이 심심치 않게 생긴다. 쇼우코와 재회한 그 커플은, 비주얼은 남미의 어느 나라 혹은 히피의 느낌이었으나 100% 토종 한국인 대학생 커플이었다. 남자분의 상투 머리와 개성 있는 옷차림은 자유로운 여행자 같았고, 여자분의 긴 검은 머리와 까만 피부는 너무 아름다웠으며 만화 주인공 '나디아'를 생각나게 했다. 안 그래도 그런 말 많이 듣는다며 웃는 치아가 하얗게 빛이 났다. 쇼우코 말로는 이집트에서 봤을 때는 '베리 화이트' 였다는데, 서로 각자의 여행을 하며 안 본 사이 저렇게 블랙이 되어 자기도 놀랐다고 할 땐, 나도 언젠간 가벼운 배낭으로 세계 여행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신기한 우연을 기대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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