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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May 15. 2018

여권

여권에 찍힌 도장을 보면 떠오르는 그때의 일들에 대한 기록

1. 여권의 발행 연도는 2008년

2. 10년짜리 여권이므로 만기는 2018년

3. 만기 이전에 여권 장수를 다 채워, 추가기재 란에 장 수를 덧붙였다

4. 추가 기재란의 반 정도를 썼고, 이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새 여권을 발급받았다.

5. 유효기간 이전에 여권을 다 채워 바꾸다니! 촌에서 온 나란 사람에게 생각지 못한 인생의 사건?!이다.


이것이 내 첫 번째 여권의 역사인데, 여권의 첫 페이지부터 차례로 그 장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 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추가기재라고 쓰인 페이지를 제외하면 실제 처음은 6,7이라 쓰인 장부터 시작된다.)

페이지의 상단 끝쪽마다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해당 페이지는 6,7

여행을 해 보면 알겠지만 여권 도장을 좀 비슷한 페이지에, 순서대로, 이쁘게 잘 찍어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찍어주는 사람 맘대로 일 때가 대부분이다. 특히 체코와 아일랜드는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딱 펼치고 그 페이지에 쾅, 던짐, 끝. 그런데 체코에서 출국 시에는 섬세하게 몇 달 전의 비행기 출입국 기록을 찾아, 마지막 페이지에 모두 모아 순서대로 이쁘게 찍어 주었다. 그건 마지막 장 소개를 위해 남겨두겠다.


처음 여행의 시작은 터키였고, 대학교 3학년 휴학 후 해외라곤 처음, 혼자 가보는 길. 계기 및 배경은 이러하다.

1. '내가' 먼저 좋아해서 알콩달콩 (아마 혼자) 연애했던 선배가 바람남. 생각해 보면 나는 연애를 너무 할 줄 몰랐다.. 아.. 흑역사... 예전에 몰래 SNS 검색해보니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잘 근무하고 계시더라. 근황은  모르지만 잘살겠지 뭐.

2. 그 반년 전쯤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사실 그때 전혀 슬퍼하거나 애도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잘생긴 선배와 헤어진 후, 그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해결되지 못했던 모든 상실감들이 쓰나미 급으로 함께 몰려왔다.

3. 졸업 전 1년을 남기고 휴학한 상태에서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선배와 나를 헤어지게 만든 간접적 원인이었던 '질투 많고 나쁜 애' 도 같은 학원에 강사로 알바 중이었다. 그 애를 보는 게 너무나 불편했다. 그리고 수업에 집중도 안될 정도로 눈물이 뚝뚝.. 흑..넘모슬퍼..선배..힝..

4. 나의 뿌리 깊은 불면증이 더욱 심해져 좀비가 되었고, 일상생활 불가 수준의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밤엔 무서워서 티브이를 틀고 잤는데, 터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 중이었다. 해가 뜰 때까지 잠깐 잠을 잔 다음에 여행사가 문 열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해서 떠나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여행은 약 5분 만에 매우 충동적으로 결정되었다.


자 이제 끝이다. 일단 여행을 떠나면 전화도 안될 테니 헤어진 선배에게 전화 걸고 미련 떨고 그런 짓도 안 하겠지. 도피든 뭐든 상관없다 있어 보이잖아. 떠나자! 와우!!!

갑자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내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이 뿌리 깊은 오만함.


대충 검색을 하고, 아무 여행사나 골라 전화를 했다. 물론 여행사에서는 터키 인, 아웃은 어디로 하실 거예요?라고 물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말 그대로 충동적이며 무정보 상태 그 자체였으므로 알아서 해 달라고 했다.


"보통 그리스로 아웃 많이들 하세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네 그럼 여권 카피 보내주시겠어요? 날짜는 언제로 봐드릴까요?"

" 여권 없는데요. "

".................... 여권 만드시는데 1주일 정도 걸리고 최대한 빠른 날짜를 원하시니 다음 주말쯤 출발로 가장 싼 항공권으로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사진관에 가서 즉석 인화 여권 사진을 찍고 바로 구청으로 달려가 급행을 부탁하며 여권 신청을 마쳤다. 근래 들어 가장 활동적으로 살아 본 날이었다. (이때 물론 학원은 관뒀고 백수였다. 수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충동적인 여행을 위해 이것저것 정리를 하려고 생각하다 보니 몇 가지가 걸렸다.

우선, 집을 비우려고 이사를 준비 중이었는데 마침 계약이 빠르게 됐다. 그런데 지금 집이 전세이고, 키우는 동물을 주변 사람에게 부탁하려면 이 집에 머무는 조건이어야 하고, 따라서 집이 그대로 있어야 하므로 계약을 파기해야만 했다. 근처에 살던, 곧 이사 오기로 한 예비 세입자를 찾아가 빌고 또빌고 이사비용에 위약금, 약간의 비용까지 얹어 드리며 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아주 큰돈으로 겨우 선처를 받았다.


자, 이제 여행만 가면 된다.


여권 발급 이야기가 나왔으니 정말 꼭 하고 싶은 말은, 여권용 사진은 면접 사진 같은 곳을 전문적으로 찍는 '잘 찍는' 곳에 가서 정성 들여 찍으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엉망인 상태의 즉석 인화 사진으로 10년짜리 복수 여권을 만들었던 나는 출입국시는 물론, 출장 시 여권 사본을 보낼 때마다 엄청난 부끄러움과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ㅜㅜ

지금 쓰는 두 번째 여권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아간 말 그대로 '잘' 찍는 곳이었고, 그땐 얼굴이 부은 상태도 아니라 별 보정할 것도 없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완성본을 내주었는데 (물론 가격은 비싸다) 이후 새 여권 사본을 받은 회사 출장권 발 담당 여행사에서는 "아니 이 대리님 연예인이에요?"라고 했다고 한다.. (실무를 담당하는 해당 직원은 유선상으로만 수없이 통화했지 나를 실제로 본 적이 없으므로 엄청난 외모 차이에 황당했을 것이다 ^ ^;;) 참고로 연예인급은 절대 아니고, 예전 사진이 그만큼 처절했음을 밝혀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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