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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May 15. 2018

여권 1

자, 튀르키예

이미 몇 개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책이나 영화 같은 작품들에 감동을 잘 받는 스타일이다. 내가 겪은 일이라면 감정 이입도 잘 되어 130%쯤 몰입하여 본다.


여행을 떠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열렬히 좋아했던 선배에게 뻥 차인 사건 + 가까운 이의 상실에 대한 여러 감정들이었으므로 그때도 역시나 열심히 책을 읽었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중 가장 도움이 됐던 책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 수업'과 나의 최애 작가인 파울로 코엘료의 '포르토벨로의 마녀'였다. 최애 작가의 작품 표지는 너무나 근사했고, 내용은 더 근사했는데 마침 그곳에 자주 언급되는 장소가 터키의 유명 관광지였다. 그래 우선 그곳으로 가자. 나도 화해와 통합의 장소인 그곳으로 가서 나의 내면을 좀 화해시키겠어.. 뭐 이런 마음이었다. 나 역시 그 책의 '마녀'처럼 나 자신을 지켜내고 세상의 조화로움을 직감적으로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여행이 도움이 될 것이다.

왼쪽의 동그란 사진이 터키 입출국 도장.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준비 없는 여행이 다 그렇듯 첫 일정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1. 비행기 환승이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모스크바 공항 경유 대기시간이 10시간쯤이었고, 당시는 비자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그 시간이 정말이지 미칠 듯이 지겨웠고 지겨웠다. 공항 내부도 공사 중이라 구경거리도 없었고 밤이 되자 공항이 점점 한산해졌는데, 날까지 어두워 지자 첫 숙소조차 예약 안 했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아 몰라 여행책에서 본 대로 술탄아흐멧 광장까지 가면 어떻게 되겠지 뭐. (이후에 나는 여행자가 아닌 출장자의 신분으로 승격하여 다시 같은 공항을 들르게 됐고 먹고 싶은 거 다 사 먹을 수 있었다. 인생은 모르는 것!) 이때 얻은 절절한 교훈은 최소한 첫 도착지 숙소는 예약 하자는 것.


2. 최소한의 환전을 공항에서 하고, 버스를 탄 후 목적지를 말했다. 친절한 버스 기사가 나를 근처에 내려주면서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아 나를 좀 케어해 주라고 터키 말로 했는데 첫 여행이라 경계심 100% 풀 장착 상태였으나 이렇게 우연히, 갑자기 만난 사람이 사기 칠 리는 없으므로 순순히 따라갔다. 때는 막 아침해가 떠오르는 새벽녘. 여기저기서 쓸고 닦고 쓰레기 차가 오는 그런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에 더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뭔.. 따라간 아저씨는 호텔 오너와 같은 급쯤 되는 가족이었으며 나를 문도 아직 열지 않은 술집에 데리고 들어가 터키 전통주 락키를 권하면서 수작을 부렸다. 그 장소에 마침 다른 사람도 있어서 절대 나쁜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숙소를 구해 준다면서 호텔방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바로 느낌이 왔다. 이건 볼 것도 없다. 그대로 배낭을 메고 다시 나왔다. 무섭긴 했으나 망설일 틈이 없었다. 겨우겨우 택시 잡아!! 나 갈 거다!! 를 외친 후 호스텔에 도착했는데, 도망칠 택시를 잡느 것조차 그 나쁜 놈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나는 아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비참했다. 한참 후 마음을 달래고 났을 때, 호스텔 주인이 말했다. "절대, 아무도 믿지 마라"


3. 내가 간 처음 호스텔은 9유로 도미토리였는데, 우연히 만난 싱가포르 여행객이 여기가 가격 대비 최고의 숙소라고 말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말 여기가 가격 대비 나오는 조식은 최고였다. 위쪽으로, 그러니까 유럽 쪽으로 올라갈수록 물가는 비싸지고 아침은 형편없어진다. 그래.. 이 좋은 숙소에 더 머물러도 상관없다. 그러나 문제는 나에게 수작 부렸던 일당들이 내가 여기 묵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겁이 났다. 숙소를 옮기려고 가이드북에 나오는 숙소들을 다 찾아갔는데, 도저히 찾아지지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정말 정말 막막해졌는데, 알고 보니 대부분 이미 업종이 바뀌었거나 문을 닫았거나. 어떤 가게에서는 친절하게, 가이드북 사진을 보더니 자기가 이 호텔 오너였으나 5년 전에 식당으로 개조했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분명 최신판 가이드북을 샀는데, 정보는 최소 3년 전에서 7년 전 정보도 있었다. 망할! (이후 나는 무조건 영어가 안되더라도 최신판 론니 플레닛을 샀다)


4. 머물렀던 호스텔은 5분 정도 걸으면 술탄아흐멧 광장이 나오는 최고의 장소였다. 근처엔 동네 놀이터도 있어서 현지인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느 날 밤 놀이터에서 반갑게도 한국인 남매를 만났는데, 터키를 한 바퀴 여행하고 귀국을 위해 처음 묵은 숙소로 돌아온 길이라고 했다. 주인과 정이 많이 들어 처음 묵은 숙소로 다시 왔다고. 이때다 싶어 그간 사정을 이야기하니 자기들 숙소로 옮기라고 해서 당장 다음날 이사! (라고 하나 배낭 하나) 그 숙소는 호텔 겸 지하층 도미토리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도미토리에는 나, 카이스트 다닌다는 똘똘한 여학생 한 명, 그리고 봉태규를 닮은 의대생 한국인 한 명과 그의 여자 사람 친구인 일본인 쇼우코 이렇게 네 명이 묵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다가 눈이 번쩍 떠졌는데 누가 내 몸을 아주 열심히 구석구석 더듬고 있었다. 술에 취한 범인은 주인의 사촌이었나, 조카였나 아무튼 도미토리 하나를 차지하고 호텔에 상주하며 일을 돕는 숙소의 직원이었다. 평소에도 여자만 보면 치근덕거리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쳐도 용서할 수 없는 성추행이지만 정말 나를 짜증 나게 한 것은 자기와 가까이 자리에 있던 쇼우코에겐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고 (남자 일행이 있었으므로) 친절하게 멀리까지 있는 나한테 까지 와서, 사람을 골라가며 성추행을 했다는 점이었다. 아래층 친구도 당했는데 이 일은 몇 주간 계속 머릿속에서 생각나 여행 내내 나를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장기 여행객들을 만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었다. 숙소 이름을 공개할까 고민이 든다.)


5. 이때 찍은 사진을 보면 살이 너무 없어 거의 얼굴 소멸 직전인데, 터키, 아니 이스탄불 물가가 너무 비쌌다. 유로는 최고치를 찍었고 파운드는 2000원까지 치솟을 때였으니 말 다했다. (이후 태국 여행 때도 달러가 1300원대를 넘는 등 여행운이 안 좋았다. 흑..) 유로도 굉장히 비쌌으니, 터키 화폐 리라는 상대적으로 더 비싸졌다. 나는 원래 터키 물가가 이런 줄 알았다. 분명 가이드북엔 유럽보다 저렴하다는데 아니 그럼 유럽은 대체 어떻다는 거야.. 1리라는 800원대 후반이라, 나 같은 돈 없는 여행자는 뭘 먹을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다. 기사식당 덮밥도 5~6리라였으니 너무 부담스러웠다. 몇 년이 지난 후 티비를 보다가 우연히 터키 패키지 상품이 너무 싸서, 리라 환율을 검색해 보곤 기절초풍할 뻔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몇 년 간의 환율 반복 탐색. 내가 갔을 때만 3배 정도 올랐던 것이다. 게다가 물가도 널뛰기라, 1리라 했던 지하철 코인 제톤이 다음 주엔 1.5리라로 바뀌고 그런 때였다. 정말 비싸고 비쌌다.


6. 요즘에야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수많은 잠재적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조금은 인정받는 분위기이지만 여행에선 사실 더 많은 일이 여자라는 이유로 쉽게 생긴다. 아무리 가이드 북을 챙겨보고 인터넷 사이트를 보며 위험도를 체크한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위험'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짜증 나는 일 들도 있다. 이스탄불을 떠나던 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갑자기 아이들 무리가 몰려들어 나에게 "웍!" 하며 놀라게 하기 시전. 너무 놀래서 정말 주저앉아 기절할 뻔했다. 이미 영혼 가출 상태. 그 애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킬킬거리며 좋아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침착하려 했으나 나는 놀라면 간이 떨어지는 목음인. 놀람을 넘어 살의가 들 정도로 저 애들을 어떻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행 때 현지인과 싸워서 득 될 건 당연히 하나도 없는 법. 남자 일행은 당하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났다. 이런 일은 사실 이후에도 비일비재했다.


정해 진 루트도 없이, 무전여행 같은 저예산 콘셉트를 가장하며 고난의 여행을 하던 나는 미련 없이 터키를 떠나 불가리아로 향했다. 이때만 해도 불가리아와 볼리비아를 구분할 줄 몰랐으며, 불가리아가 터키 옆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같은 숙소에 묵던 이들 (의대생과 일본인) 이 간다기에 그냥 따라나섰다.

아무튼 튀르키예, 빠이 짜이찌엔이다.


Ps. 아, 애초 터키 여행 목적이었던 아야소피아 사원은 잘 감상했고, 블루모스크는 너무나 좋았으나 발 냄새가 너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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