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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May 23. 2018

여권 4

여행의 감상 In 루마니아

좋은 사람을 만났던 여행지는 좋은 기억으로 남고, 불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낯선 곳에서의 쓸쓸함과 막막함은 배가된다.


여행 때 마주하게 되는 긴, 혼자만의 시간.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언젠간 세상의 빛을 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혹은 그저 시간을 때우는 용도로, 어떨 때는 정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온전한 감동을 잊지 않기 위해 열심히 기록했던 여행의 흔적들. 깨알 같은 글씨들은 빼곡하다 못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시간을 생생히 복기할 수 있게 한다. 잊고 있던 장면들과 장소들을 환기시킨다.


처음으로 한국인을 만났던 브라쇼브.

중심 광장에서 보이는, 산에 걸린 BRASOV라는 글자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아침에 호스텔에서 눈을 뜨면 서늘하고 청명한 공기에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혼자 하는 여행의 쓸쓸함은 잠깐 휘발되고, 어디론가 나가 마구 걷고 싶다.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중심 광장은 아름답고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예뻐 보인다. 까만 외벽의 성당에서 듣는 오르간 연주는 오랫동안 냉담자로 살았던 내 마음을 마구 흔들 정도로 경건하고, 두려울 만큼 아름답다. 숙소에서 처음으로 (미국 국적의) 한국인을 만나 2달 만에 처음으로 한국어를 쏟아 내 본다. 그녀와 동행하는 친구는 유명한 가이드북의 저자이면서 말로만 듣던 하버드를 다니는 학생이다. 내 공간에서 머무른다면 평생 마주 칠 일이 없을 다양한 이들을 여행에서 만나게 된다.


하얀 탑과 검은 탑을 번갈아 오르며, 이 풍경 속에서 오롯이 낯선 이방인인 나 자신이 약간 서럽고 외롭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잠깐은 잊게 하는, 이곳의 아름답지만 압도적이지 않아 온기가 가득한 건물들과 풍경을 내려다본다. 여름이지만 서늘하다. 바람이 불 때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의 가을 날씨 느낌이 난다.


뒤로 보이는 검은 성당, 도시마다 이런 광장이 대부분 존재한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잠깐의 인연, 지금쯤 자신의 분야에서 이름 날리고 있지 않을까.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시기쇼아라

내가 소설 속의 트란실바니아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했고, 집시에게 사고를 당해 괴로웠다. 이 괴로움은 두려움이 되어 여행 전반에 걸쳐 나를 힘들게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피곤한 일이다.


가끔 도로에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날이 있었다. 운 좋게, 마음 좋은 집시 부부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과, 그저 구걸로 생을 이어 나가는 두 종류의 집시로 나뉜다는 루미의 말이 떠올랐다. 이들의 미소는 노동하며 삶을 영위하는 맑은 사람의 미소이다.


좋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과거의 나를 전혀 모르는 철저한 타인들에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을 고백하며 그제야 이별을 인정했다. 사랑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해 내 입으로 말하며 눈물 흘린 최초의 경험을 했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겐 치유가 되었다.

이 집 피자 너무 맛있었다.. 날마다 바뀌는 토핑이 예술..!




꿈결 같은 시비우

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지, 말 그대로 내가 그토록 머물고자 했던 장소. ‘포르토벨로의 마녀’ 로 불린 ‘아테나’ 가 태어나 입양된 소설 속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 눈물이 많아진 나는 이 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코가 시큰거리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내가 삶의 주인이므로 모든 순간을 인식하며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미안함과 죄책감. 나에겐 성서보다 더 신의 존재를 와 닿게 그려낸 이 책을 보며 세상의 만물엔 신이 깃들어 있으며, 선의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나로부터 행해지는 선이 타인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으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반복하여 다짐한다. 시비우의 모든 광장과 거리는 어느 유럽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답고 촉촉한 길들이었다. 더운 여름에도 비가 오면 쌀쌀한 가을 날씨가 되었고, 사람들은 흐드러지게 웃었고, 광장의 아이들은 기쁘게 뛰놀았다. 지붕의 눈 모양은 꼭 사람 눈 같았는데, 함부로 큰 창을 낼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의 슬픈 역사와 관련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눈 모양의 창문. 덕분에 내내 누군가 날 보는것 같았던 기분이....
시비우의 광장
시비우의 골목



내가 다시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면, 아마 루마니아가 그 시작점 혹은 종착점이 될 것이다. 그곳의 닿지 못했던 무수한 골목들에 내 발자국을 남기고, 모든 풍경을 내 눈 속으로 담아오고 싶다.


좋은 사람을 만났던 여행지는 좋은 기억으로 남고, 불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낯선 곳에서의 쓸쓸함과 막막함은 배가될 것이다.


그 쓸쓸함마저 그리워지는 여행에 대한 향수는, 일상을 사는 사람에게 불치병 같은 것으로 늘 떠날 곳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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