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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May 28. 2018

여권 5

헝가리, 부다페스트

루트가 꼬여 헝가리를 두 번 가게 됐다 


한 번은 맘 편하게 지냈던 시기쇼아라에서 출발하여, 준비되지 않은 여행의 패닉을 경험한 후 다시 시기쇼아라로 컴백했던 첫 번째.

이후 다시 서쪽으로 세르비아, 보스니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몇 달 만에 처음 본 한국인 일행의 루트에 동행하면서 그들의 루트에 따라 다시 들른 두 번째


처음 갔을 때의 막막함이 생각난다. 

부다페스트행 기차가 오니까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고, 기차에 오르고 나서야 좌석이 선착순이란 걸 알았다. 객실은 복도까지 꽉 찼고, 남은 자리는 화장실 앞. 우리나라 같으면 철도청장 나오라고 난리 났을 상황 정도 될 듯한데, 당연한 듯 공간을 지배하는 무질서함은 내가 생각한 유럽과 너무 달랐다. 밤에 탄 기차는 아침해가 뜨고 난 후 국경을 넘었고, 헝가리 쪽 국경 검사관들이 기차에 올라 여권을 검사한다. 마침 작은 자리가 나서 기차 칸으로 이동한 상태였는데 그 칸에 동양인은 나 혼자였으며, 밤차+피곤함에 꼴이 엉망인 나를 검사관들은 유심히 살피기 시작한다. 내 여권과 나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더니 방문 목적을 물으며 어깨에 메고 다니는 판독기 같이 생긴 상자에 내 여권을 넣어 보길 수 차례. 마침내는 한 명이 여권을 가져갔다가 한참 후 돌아왔는데, 처음 겪어보는 이러한 상황이 처음엔 당황스러웠으며 나중엔 화가 났다.


왜 화가 났을까.. 

익숙한 눈빛이었다. 익숙한 행동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몰상식한 사람들이 하는 바로 그 행동.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붙이기도, 불편한 눈빛을 던지기도 하는 일들. 주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시선. ‘너는 내 아래야’라는 표정과 눈빛의 언어. 

그 행동을 낯선 장소에서 고스란히 내가 받고 있었다. 

이들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다른 피부색을 가졌으므로 분명 헝가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왔을 것이라는 편견 가득한 시선. 그런 대우를 받았다. 여행자들로 꽉 찬 기차 안, 불편한 시선들이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그 칸의 대다수가 내 여권을 꼼꼼히 조사하는 검사관과 나에게 집중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난 그 열차칸의 원숭이였다.

이토록 집요하고 긴 여권 검사는 공항에서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 이 글을 쓰다 생각 난 일인데, 어느 날 회사를 방문한 외국인 고객에게 깡통시장을 구경시 켜고 있었다. 갑자기 아저씨 한 명이 "너 파키스탄 인이야! 니나라로 가라!" 면서 삿대질을 하니 어리둥절한 고객은 "돈을 달라는 건가?" 라며 지폐를 꺼냈는데 난 그게 아니라고 말리고 그 아저씨는 우리가 모른 척 지날 때까지 욕지거리를 멈추지 않았다. 차별당한 이가 차별하는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밤새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피곤함을 배낭 위에 얹은 채로 기차에서 내린다.

아무 정보 없이 다니기에 부다페스트는 너무나 대도시였고 나는 아무 정보가 없는 여행자이다. 가이드북 없이 이제까지 운 좋게 숙소에 잘 도착했던 건 이제까지의 여행지는 작은 마을이었거나 정보가 있는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발 전 미리 예약하려고 했던 숙소는 8유로였는데, 계속 4개의 침대가 선택되어 결제 화면엔 32유로로 뜨기에, 일단 해당 숙소의 약도만 뽑은 뒤 직접 가서 해결하자고 생각했다. 다른 대안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던 나의 안일함.

무거운 배낭을 메고 찾아 간 숙소를 보니 한 Room(4인실) 이 최소대여 단위이며, 1개 대여는 불가하다는 것. 기차역에 너무 일찍 도착 해 Information center 가 열기를 기다리는 배낭여행자들이 있었는데 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도 그들 틈에서, 최소한의 정보는 얻어 왔어야 했다. 잘못된 정보 하나만 믿고 기차역을 빠져나와 무거운 배낭을 멘 채로 아침부터 몇 시간을 걸었더니 플립플랍이 뜯어졌다. 막막하고 두려운 기분. 도시에 녹아든 아름다운 건축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길 건너에 지도를 들고 있는 ‘배낭여행자’ 로 보이는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가장 가까운 호스텔을 알려 달라고 부탁한다. (배낭 여행자는 큰 배낭과 손에 든 지도 만으로 구별하기 쉽다.)


짧은 영어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부끄럽다는 사치스러운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친절하게, 론니플레닛 (대중적이며 믿을만한 가이드북, 배낭여행자들의 바이블 같은 책)을 펼쳐 근처 가장 가까운 호스텔을 찾아준다. 위치와 가격 정보 모두. 너무 고맙다고 세 번쯤 연달아 말한다. 근처까지 함께 걸어 가 준 덕분에 겨우겨우 호스텔에 도착한다. 살았다. 이제야 한 숨 돌린다. 

친절한 여행자의 도움으로 찾아간 ‘빨간 버스’ 호스텔은 체크인 하기는 아직 이른 시간. 예산보다 비싼 곳이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새 없이 온몸이 녹초였고, 숙소를 찾지 못할지 모른다는 심리적 공포를 겨우 벗어났기에 더 재 볼 여유가 없다. 

양해를 구한 뒤 우선 배낭을 내려놓고 샤워를 한 후 체크인 시간을 기다린다.. 마침 청소가 끝낸 침대를 우선 배정받고 보송한 이불에 누우니 세상이 천국 같다. 하루 안에 많은 일과, 두려움을 필두로 한 다양한 감정들을 겪었다.. 여행 때 이런 감정들이 제일 어렵다. 두려움을 동반한 막막한 감정. 그리고 수치심.


제대로 씻고 잠깐 낮잠을 잔 뒤에, 제일 먼저 서점으로 갔다. 더 이상 가이드 북 없이 다니는 것은 무리다. 포린트 화(헝가리 화폐 단위)로 계산하니 정가보다 훨~씬 비싸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큰 맘먹고 카드결제를 할 때도 무슨 번호를 입력해야 했는데, 지금이야 PIN CODE라는 말을 쓰지만 그때 나는 그 말이 뭔지 몰라 주인과 한참 씨름했다..ㅜ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느낄 새도 없었다. 사실 부다페스트는 걷는 곳곳이 그림이 되는 곳이다



근처 마트에 들러 마음을 진정시켜 줄 맥주와 먹을 것을 조금 산다. 가방에 든 파스타 병을 열었는데 펑! 하며 사방으로 튀는 소스. 가방이며 옷이며 엉망이 되었다.


울고 싶다. 나 오늘 왜 이러는 걸까.


Ps. 비싼 돈 주고 샀던 론니플레닛은 유용한 정보가 자세하게 나와 있다. 헝가리의 밤거리는 여자 여행객이 걸어도 안전하다는 설명을 믿고 조심스럽게 밤거리를 나섰다. 그렇게 들른 아래의 장소들!

유명한 바로 그 성당!
갑자기 비가 쏟아져 당황헀는데 사람들이 근처 건물로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가고, 건물 문지기도 친절하게 문을 열어줘서 나도 그들 틈에서 비를 피했다. 이런 따뜻함이 신기하다
지금 다시 보니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그곳에선 흔하디 흔한 골목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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