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랑받았던 기억, 그 후1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었던 시간

by 떠돌이

너는 나를 살게 하는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강렬했던 감정이 생생히 기억난다.

너를 만나면서, 특별할 일 없어 평생 무채색일 것만 같던 내 인생에 이렇게 반짝반짝 행복한 날들이 있구나, 살아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이런 행복이 찾아오는구나 싶었다.

아직도 공개된 채 남아있는 옛 미니홈피의 글에는 살다 보니 이렇게 행복한 날이 다 있다며 너와의 연애에 대한 행복한 감정 애틋함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주변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내게 헌신하는, 너는 정말 괜찮은 남자 친구였다.

사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너는 우리가 만나기 전 이미 계획했던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고, 나는 얼마 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너는, 워킹 홀리데이를 하는 와중에도 나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에서 태국으로 날아와 주었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함께 여행 한 모든 시간이 꿈결 같았다.


여행이 끝나고 너는 뉴질랜드로 돌아간 후, 함께 여행했던 동안 나 몰래 찍었던 나의 사진, 우리의 사진, 풍경이 담긴 사진들을 인화하여 뒷면에 편지를 써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나도 모르게 찍힌 나의 사진들 뒷면에 네가 절절하게 써놓은 글귀들은 내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내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 와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때에도, 우리는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매일 통화를 했다. 한국의 내가 늦은 새벽 아르바이트를 끝나고 들어갈 때면 뉴질랜드의 너는 아침에 일어나 전화를 해 내 귀갓길을 챙겨 주는 것으로 나는 하루를 끝내고 너는 하루를 시작했다.

어느 날 네가 갑자기 죽는 꿈을 꿨는데 그 느낌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네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헛헛하고 말할 수 없이 허망하던지 나는 시차를 무시하고 네게 전화를 걸어 너의 안부를 확인했다. 안심이 되지 않아 몇 번이고 당부했다. 제발, 제발 꼭 조심하라고. 꿈이라는 간접 경험을 통해 나는 네가 없으면 얼마나 괴로워 질지 알게 되어 버렸으므로. 그만큼 너를 사랑했다. 너는 나를 말 그대로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의 손짓 하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너는 울고 웃었다. 나는 함부로 살수도 없었다.


졸업을 하고 내가 취준생일 동안에도 너의 헌신은 계속됐다. 함께 살던 언니에게 나모르게 연락 해 집에 들어와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채워주고 가기도 했고 취업 후에도 잠든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해 가며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언니 역시 그런 너를 참 이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게 그렇듯, 행복의 이면에 예감되는 불길한 느낌은 못 본 척하거나 잠시 접어두고 싶어 한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겠지, 같은 핑계로. 혹은 이 완전해 보이는 행복에 방해가 될까 봐. 이 행복을 깨고 싶지 않은 이유로.



우리가 연인이 되기 전, 우리는 꽤 괜찮은 친구였다.

너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잘 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낯간지러운 칭찬도 아무렇지 않게 했고, 타인을 과하다 싶게 챙기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했다. 그 친절함이 고마웠지만, 그런 너를 유심히 볼 수록 나는 네가 가면을 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연애 초반, 나를 보기 위해 뛰어오는 행복한 얼굴의 너를 보며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는 너에게 솔직히 말했다. 너는 그때, 솔직함이 최고의 가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던 때였다. 너에게 솔직함을 보이길 원했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너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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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물론 나에 대한 사랑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분명히 보이는 것, 너는 사랑에 빠진 너의 모습에 도취된 것 같았다. 중간중간 우리를 거쳐간 시련 조차 너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힘들어했으며 그것조차 사랑했다.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너는 '사랑'의 범주 속에 있다면 무엇이든,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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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우리는 헤어졌다. 나 때문이었다.

그렇게 잘 해 주었던 너를 두고, 나는 첫 입사한 회사의 동료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실을 너에게 말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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