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겐 나를 상처 줄 권리가 없다
이후 우리는 헤어졌다. 나 때문이었다.
그렇게 잘 해 주었던 너를 두고, 나는 첫 입사한 회사의 동료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을 너에게 말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내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나를 기다렸던 너는, 그리고 몰래 집 앞에서 염탐을 하던 너는 여러 정황 증거를 통해 알게 된 모든 사실을 토대로 몹시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첫마디는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였다.
나는 모든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네게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두 사람 다 좋다고. 어이없어하는 너에게 나는 그냥 솔직한 내 감정을 가감 없이 말했다. 정말 두 사람 다 좋아. 너는 기막혀 하며 방방 뛰면서,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한체 "아내가 결혼했다"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말이 안되는 상황이라며.
너는 깊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사랑하고 헌신했던 나에 대한 배신감과, '사랑에 빠진 네 모습'을 망가뜨린 나에 대해.
너는 철저히 변했고, 그러한 변화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한 행동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 역시 아니다.
내 잘못으로 우리가 헤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자살 소동을 벌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너의 집 난간 에서 벌인 자살 소동 이후, 너는 내가 처방받은 수면제를 한 입에 다 털어 넣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삼백만 원을 달라고 했다. 그 큰돈이 취준생인 나는 없었다. 이후 막 취업한 나는 언니의 시집으로 비어버린 주택 보증금을 메꾸느라 월급은 내 돈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던 최선, 백만 원이 조금 넘는 여윳돈을 끌어 모아 너에게 줬지만 너는 집요하게 네가 원하는 만큼의 '위자료'를 요구했다. 한참 후에 만난 너는 그 돈으로 최면치료 등을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돈 날렸다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 잘못으로 우리가 헤어졌다고 해서 네가 내 회사에 전화를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어렵게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너는 회사에 용무가 있는 척 전화를 해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한 동료의 연락처와 신상을 캐내어 나를 곤란케 했다. 잘못은 그 동료가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너는 집요하게 내 사회생활을 파괴하겠다며 회사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너는 대단한 거짓말을 했는데, 너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고 했다. "떠돌이 남자 친구 맞으시죠? 떠돌이가 다른 남자가 생겼어요. 같은회사 곰씨를 좋아해요" 이렇게 친절하게 직접 알려 주는 전화가 왔었다고.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증거도 없는 이런 유치한 거짓말을 믿었던 건, 너는 그럴 리 없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내 주변의 모든 동료를 의심해야 했으며 회사 생활은 지옥이 되었다. 이 사실조차 소문이 나면서, 한 동료와는 사이가 틀어져 출근길에 폭행을 당했으며 자살하고 싶을 만큼 전사적인 괴롭힘을 받았다.
전화를 받았단 건 사실 너의 교묘한 거짓말이었다. 내 사회생활을 망치겠다는 너의 작전은 성공하고도 남았다.
내 잘못으로 우리가 헤어졌지만 그렇다고 네가 내 사생활을 캐내고 유출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너는 내 메신저의 비번을 캐내어 모든 내용을 다 파악한 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를 시험했다. 계속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해댔고, 얼버무리거나 네 예상과 다른 답을 하는 나를 스타벅스 앞에서 "못돼 쳐 먹은 씨발년" 이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매우 성적인 욕설과 함께. 그때 나는 눈치챘어야 했다.
끝난 관계에서,
죄책감으로 인해 너의 요구를 계속해서 들어줘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너는 이미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님을.
달라진 너를 보며 느낀 가장 큰 감정은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이었다. 그리고 나의 사생활, 정보를 어디까지 아는지 감도 안 잡혀 아득한 상태로 너에게 물었다. 내 모든 정보를 만약 안다면 유포할 것인지.
너는 태연히 말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런데, 우리가 찍은 비디오가 있으면 당장에 다 유포시킬 거고, 너는 당연히 나만큼 고통받아야 해 아니, 니 잘못이니 네가 더 당해야지!"
어벙벙해져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두고, 너는 재빠르게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며 내 메신저 내용 중 아주 개인적인, 몇 번을 보았는지 외우기 까지 한 나의 '개인적인' 메신저 내용을 와다다다 다 쏟아내고 훽 가버렸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머리가 핑글 거렸다.
내 잘못으로 우리가 헤어졌지만 네가 내 일상을 망쳐도 되는 것은 아니다.
너는 처음 입사 한 회사에서 갈피를 못 잡는 내게 자주 메일을 보냈다. 메일의 내용은 대게 욕설이거나 협박이었다. 그것도 신상에 대한 무시무시한 협박. 내가 출장 가는 걸 어떻게 아는지, 날짜에 맞추어 저주를 가득 담은 메일을 보내곤 했다. 어느 날, 어떤 영화를 보고 너의 심정이 이해가 간 나는 너에게 장문의 사과 메일을 보냈다. (네가 끝까지 요구한 항목이었다.'진심 어린 사과') 그리고 온 답장은, 다시 한번 내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에 관한 서술과 다양한 종류의 협박이었다. 너는 이제 헤어진 남자 친구가 아닌 그저 나를 위협하는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내 잘못으로 우리가 헤어졌다고 해서, 네가 나를 때려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칠푼이 팔푼이인 나는, 너를 만날 땐 더했다.
나는 사람의 악의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헤어진 후에,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너를 만났다. 운전을 하고 있던 너는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이 격양되어 다른 사람처럼 무섭게 굴었다. 나는 뛰어내리겠다며 문을 열었고 놀란 네가 차를 한쪽에 세운 뒤 나는 차에서 내려 다른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네가 내 팔을 잡아챘다.
그리고 번쩍이는 불꽃, 키가 큰 네가 내 양쪽 뺨을 연달아 내리쳤다. 머리통이 울리고, 얼마나 셌던지 내가 길가로 넘어졌다. 내 멱살을 잡고 반대쪽 뺨을 다시 때렸다. 뺨이라기보다 머리 전체가 맞겠지. 네 큰 키만큼 손도 큰 편이었으니.
두 세대를 맞은 내가 종이 짝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치이며 넘어졌고 입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지나가던 행인이 뭐하시는 거냐며 신고를 하겠다고 하니 너는 침착한 목소리로 아는 사이라고 했다. (지금도 의문이 든다. 그게 왜?)
나는 그 행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살려주세요ㅡ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말려주세요 제가 도망가게라도 좀 잡아주세요. 그 사람이 신고를 하려고 하자 당황하는 너를 틈타 나는 벗겨진 신발을 들고 뛰고 뛰어 모퉁이를 돌아 이름도 모르는 건물로 들어갔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네가 나를 찾아내어 남은 응징을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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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후에도 병신처럼, 네가 취업 준비를 위해 무언가를 부탁할 때 너의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너를 (정확히는 나에게 잘해주던 너의 모습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네가 다른 여자 친구를 사귀며 끝이 났다. 시간이 흘렀다. 너는 취업 준비를 핑계로 내게 여러 차례 연락을 했고, 다른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으면서도 내게 같이 자자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이제야 나는 안다. 우리의 사랑은 아름다웠을지 모르지만 지저분한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움마저 더는 아름답게 볼 수 없게 되었음을.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나는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 막 대해도 되는 한 명의 사람이 됐음을. 네 안의 악마가 내게 마음껏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연애 때도 나는 알아차렸어야 했다.
네가 내게 잘 해준다고 해서 모든 행동을 용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너는 내 신체에 대해서도 웃으며 평가했다. 장난처럼.
너는 종아리가 이쁘지 않아 그래서 스키니 진을 입으면 티가 나.
내가 운동 좀 하면 너보다 가슴이 클 거야 (지금 생각해도 이건 말인가 막걸린가 싶다)
화장 안 한 맨 얼굴을 보며 '못났다'라는 장난 섞인 말들. 그러나 진심으로 음절을 길게 빼며 놀리듯 했던 말.
이외 더 내밀한 잠자리에 관한 '성적인' 평가는 정말 내 손으로 쓸 수가 없을 정도이다. 덧붙이자면, 그런 평가를 한 사람은 내가 만난 사람 중 너 하나였다. 내가 아닌 너의 문제였다.
너는 우리의 모든 연애 과정을 너의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스킨십을 하고 어떻게 잠자리를 하는지.
그리고 그 사실을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느 날, 나를 뒤에서 안으며 너는 말했다. "뒤에서 안으며 귀에 대고 속삭여주는 걸 좋아한다고 엄마가 그랬어." 머리가 핑글핑글 했다 병신인가..?
나도 병신같이, 더 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넘겼다. 그건 너뿐만 아니라 나의 사생활도 포함되어 있는 문제야. 그러지 않았으면 해. 라고 부탁조로 말해야 했다. 지금 같으면 싸대기를 날렸겠지만. 무튼 너는 내 부탁이 안중에 없었던 건지 엄마에게 보고하기와 조언받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우리의 연애사는 갱년기인 너의 어머니를 감정적으로 몹시 자극했다. 정작 우리가 친구였을 때 나를 보며 '저런 애랑 연애를 하라'라고 했던 너희 엄마는 여자 친구가 된 나를 탐탁지 않아했고 심지어 적의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넌 그걸 전혀 몰랐다. 눈치까지 없는 새끼.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유별난 연애를 했다" 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이 잘못한 것이다"라고 할지 모른다.
유별난 연애라, 아니. 나는 이후에 만난 사람들에게서도 언제든 발현될 수 있는 폭력성을 보곤 했다. 그건 아주 단순한데서 발현되곤 한다. 술을 먹으면 평소 안 하던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나, 종업원을 하대하거나, 군대 복무 이야기에 여자는 왜 안 가냐고 게거품을 물거나, 군대의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등등. 이건 극단적인 예지만 그 폭력성이란 것이 너무나 일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알아채기 어렵고 또 끊임없이 상기하고 교육받아야 고칠 수 있다. 말로는 평등하다고 하지만 실제 관계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평생 '폭력을 기반으로 한' 가부장 제도에 물들다 못해 찌들어 살아왔으므로.
이후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혹시나 몰라서 저지르는 폭력성 담긴 행동에 대하여 나는 자세하게 설명했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즉시 관계를 접었다. (최근 며느라기 라는 좋은 웹툰이 책으로 출판 되었다. 일상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 서로 다른 입장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굉장히 쉽게 풀어 놓았다.)
당신 때문이다, 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위의 글을 보면 충분히 이해됐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잘못으로 헤어졌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내가 폭력이나 협박을 당할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덧붙이자면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을 (폭력적이지 않은 평범한 사람) 만나는 기준은 너무나 명확하고, 또 쉽다. 그 기준을 아주 간결하게 정리 해 놓은 브런치 작가 "yangpa" 님 글을 추천한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을 걸러야 하는지 자세히 나와있다.
이후 나는 이러한 가치를 이해해주거나 혹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존재함을 인정하며 함께 가치를 공유 해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서로의 가치를 나누며 이어가는 관계는 행복하다. 고로 나는, 평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상대에게 기대하는 명확한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