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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Jun 14. 2018

여권 5-1

영혼의 절벽으로 걸어가기

아일랜드의 더블린 공항은 입국 심사가 까다로웠다.

직업에 대해 묻는 표현을 뭐하냐?로 들었다. What do you do?

두 번만에 이해 한 나는 뻥을 좀 보태 여행 작가라고 말했다. 그의 요구에 따라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보여 주었다. 불친절하고 투박한 도장 위에는, 쉥겐 조약 국가에서 머무를 수 있는 90일이 아닌, 티켓에 맞춘 제한된 체류 제한 기한을 적어 주었다. 이 글을 적기 위해 여권을 펴 보니, 총 2개의 도장이 찍혀있다. 다른 국가와 같은 유럽연합 도장과 아일랜드 체류 조건에 대한 도장.


입국 검사원의 첫인상이 무서웠다. 그래, 내가 낯선 곳에서 불친절한 이에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무서움'이다. 무서워서 웃었다. 그의 자비를 바라며, 내가 무사히 입국할 수 있길 바라며.

(무서워서 웃었다는 표현은 성폭력 피해자의 말에서 본 문장인데, 너무나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나도 무서우면 웃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므로. 혹시나 인용에 문제가 될까 표현의 출처를 밝혀둔다.)


종종 인생이 이유 없이 서러울 때가 있다. 나에겐 낯선 곳에 첫 발을 디뎠을 때 그래서 막막할 때가 그렇다.

여기서도 그랬다. 더블린과 골웨이의 젊은이들은 한없이 화려했고 나는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더블린을 벗어나 소 도시로 이동했다. 다들 짧은 코스로 들렀다 가는 이 작은 마을 둘린. '영혼의 절벽' 이 시작되는 입구가 되는 이 곳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앞의 글에서 소개한 펍 1개가 마을의 중심이 될 정도로 작은 마을은, 내 마음을 촉촉하고 포근하게 만져 주었다.

숙소의 목조로 짜인 튼튼하고 아늑한 침대가 그랬고, 아침이 되면 들어오는 햇살이 그랬다. 5월임에도 우리나라 가을을 생각나게 하는 청명한 아침 공기도 그랬다. 나의 서툰 영어에도 늘 웃으며 말하는 직원 할머니가 그랬다. 그리고 더없이 맛있었던 기네스 맥주까지. 이 마을에선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며칠을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향유하고 싶었다. 빈둥거리는 날이 지겨워질 무렵, 오늘은 가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이 작은 마을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적지. 영혼의 절벽, "Cliffs of Moher"


출발이다.



걸어가면서 보니 옛 집터와 성터로 짐작되는 흔적들이 보인다. 지금 사진을 다시 보니 왕좌의 게임에 나올법한 풍경이다. 그때의 내가 왕좌의 게임을 알았다면 이 풍경조차 흥분하며 환호하며 봤을 텐데 아쉽다.

On the way to Cliffs of Moher


마을에서 본격적으로 절벽이 시작되는 곳 입구까지는 그냥 도로변 혹은 절벽을 따라 옆으로 걸어가면 된다. 나는 도로변과 바닷가 절벽 옆을 왔다 갔다 하며 걸어갔는데 울타리가 없는 구간이 많으니 여기서 비명횡사해도 아무도 모른다. 조심 또 조심..

걸으면 보이는 사소한 풍경이 이정돕니다
도로변으로만 걸어 가기엔 바닷가 쪽 길이 너무나 아름답다. 길이 제대로 난 곳이 아니라 조심조심, 울타리가 없는곳도 더러있다.


설렁설렁 걷다 보니 3시간쯤 지나 입구에 도착했다. 웅장?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한눈에 풍경을 담는 것도, 끝을 조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실 절벽의 일부가 유명한 관광지 일 뿐 내가 걸어온 길부터 절벽은 이미 시작된다. 이곳이 목적인 여행자라면 나는 둘린에 며칠 머물며 여유롭게 걸어갔다 오기를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더불어 편한 신발과 바람막이는 필수. 정말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제낀다. 도착한 절벽 언덕에서는 더더욱!

영화 PS I love you 의 낭만..이라는 나름의 판타지를 몰래 숨겨 왔는데 판타지고 뭐고 분위기를 느낄 틈도 안주는 강도의 바람이었다.

영혼의 절벽, 이름만으로 얼마나 로맨틱한지







사실 오늘이 이상하게 그런 날이다.

종종 인생이 이유 없이 서러울 때가 있는 그런 날,

아니 마음을 또렷하게 들여다본다. 서러움 보단 외로움과 두려움이 실체 없이 내 마음속에 그림자를 진하게 두르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이번 주와 다음 주에 시험이 있고, 감정에 잡혀 먹힐 시간이 없음에도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도록 자꾸 속이 훅훅 꺼져서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다.


여행을 그리워하지 말자. 그 낯섦도 아닌 실체 없는 감정을 그리워하지 말자, 추억할 사진이 있어서 다행이다. 두서없이 끄적여본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이다 라고 그 옛날에 웃으면서 농담으로 했던 말을 곱씹어 본다. 퉁퉁 부은 얼굴이 못마땅하다. 싸구려 연대감에라도 기대고 싶은, 오늘이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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