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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Jun 26. 2018

여권 8

여권 한 권 다 쓴 날들의 기록 : 크로아티아 폴리트비체 or 플리트비체

목적지를 말하니 새벽 2시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여행을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동안 나는 한 번도 제시간에 도착하는 버스와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었다. 2 시인 즉, 아마 아침 정도 도착할 거란 이야기. 차에서 자다가 아침부터 구경을 시작하면 되겠군 했다. 보스니아를 가는 길에 만난 한국인 남매와 함께였다.


내가 너무 마이너한 여행 코스를 택한 건지 불가리아 이후로 한국인 여행자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아, 말하지 못하는 그 답답함은 손으로 표출되어 나는 강박적으로 여행 일기를 써댔는데, 그러던 중 만나게 된 한국인이라니! 모국어로 마구 말할 수 있다는 기쁨 하나로 그들을 따라서 예정에도 없던 크로아티아, 그것도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에 가게 됐다. 막상 별 쓸 일이 없던 국제학생증 할인도 된다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이야 크로아티아는 각광받는 여행지이지만, 내가 갔을 당시만 해도 전혀 유명하지 않았고 여행자들의 카페에서나 검색될 법한 곳일 뿐 패키지 상품은 당연히 없었다. 오히려 생소한 국가명으로, 주변에 말해봐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내가 여행을 다녀온 지 몇 년 후 신문기사에 제법 큰 지면으로 할애되어 소개된 기사를 보며 왠지 모를 반가움과 서글픔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을 느끼며 기사를 읽었던 생각이 난다.


버스를 탈 때부터 짐 값을 요구하는 기사와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론니플래닛의 '하이라이트'에 소개된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이었기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룰루랄라.

버스가 출발하고 어둠이 내릴 때쯤, 동유럽 여름밤 흔히 볼 수 있는 광란의 천둥 쇼가 펼쳐졌다. 저~멀리 산 너머로 쉴 새 없이 번쩍이는 번개와 천둥소리 덕에 버스에선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배낭여행자들의 여행이 그렇듯, 우리는 고단했고 배고팠다. 잠이라도 좀 잤으면 싶었건만.


설핏, 선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버스 기사가 내리라고 말한다. 사방이 깜깜한 숲 속 한가운데 도로.

응?? 정신을 차리고 몇 번을 물으니 여기가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이니 내리라고. 일단 나, 남매 이렇게 셋이 내린다. 어둠 속, 시간에 같이 내리는 사람들은 없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수도인 자그레브가 목적지가 아니었을까, 가는 길에 우릴 내려준 것이고. 지금에서야 짐작해 본다.


이럴 수가.

우리가 내린 곳은 정말 산중의 깊고 깊은 숲 속 도로 한가운데, 시간은 새벽. (물론 2시는 아니었고 3시) 사방은 어둡고 저 멀리 정말 조그마한 불빛이 하나 보일 뿐, 아마 나 혼자였더라면 공포감에 패닉이 왔을 거다. 셋이어도 한 밤중 숲 속이 무서운 건 마찬가지라, 일단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걸어간다.


Post라고 쓰인 건물 앞, 유일하게 입구의 천장 등 하나가 켜져 있다. 막막하다. 그래 이 시간에 여길 구경 오는 사람이 어딨겠어.. 열린 사무실은 당연히 없을 테고. 일단 여기서 아침까지 버티기로 한다. 너무 춥다. 있는 옷을 다 꺼내어 팔에 꿰고 목에 두르고, 기념품 삼아 가지고 있던 각 지역의 지도를 다 꺼내 바닥에 깔고 눕는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몰려 오지만, 셋이라서 다행이다. 혼자였으면 제대로 공포스럽고 우울한 여행이 될 뻔했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올 리가 없는 잠을 겨우겨우 청해 본다.

새 우는 소리 몇 번을 들은 것 같았는데 저 멀리 동이 트고 주변이 밝아온다. 일어나 몰골을 수습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입구로 보이는 곳으로 향한다. 입구를 지나


자, 이제부턴 말 대신 사진으로

저기서 보이던 작은 빛이 정말 구세주 같았다ㅜ 계단에서 노숙하고 관광 시작 전, 이 기억도 추억 될거라며 잊지 않기위해 기념으로 찍어 놓았다.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추억^ ^
비온 뒤의 폴리트비체는 얼마나 아름답고 싱그럽던지!
국립 공원 내에서 유일하게 요기가 가능한 곳, 당연히 가격은 비쌉니다
국립공원에선 절대 낚시 금지인데, 배가 너무 고파서 저 물고기를 보며 먹고싶단 생각만 했었다..
오리때 완전 귀엽고 사랑스럽다
코스 선택에 따라 아래에서 시작 할 수도, 위에서 시작 할 수도 있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여행 후 토로하는 아쉬움은 '사진에 눈에 본 그대로의 색감을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이다.

살면서 평생 본 적이 없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에메랄드 빛과 코발트 빛, 그리고 투명함.

비 온 뒤의 싱그러움, 해가 뜬 후의 쨍함과 그늘의 서늘함.

다채로운 느낌에 모든 감각이 편안하게 늘어지고 이내 행복감이 느껴진다.

인위적인 것을 극도로 제한하여, 걸어 다니는 코스는 모두 자연적으로 낸 길이며, 그렇지 않은 곳은 모두 나무만을 이용하여 발 디딜곳을 만들었다.


<혹시나 여행 팁>

1. 현재는 공원 내, 근처에 숙박 시설이 많이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땐 입구의 큰 호텔 1개가 유일한 호텔이었음)

2. 소요되는 시간 별 여러 코스가 있고 그 강도도 설명되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곳을 선택하면 된다. 꼭 하루 전부를 온전히 할애하여 천천히 즐기길 강력추천!! 걷다가 배도 타고, 지상 기차? 도 타는 다양한 코스가 있다.

3. 요기할 거리는 꼭 싸가자. 몇 시간을 걷다 보면 배고프다. 어딘가에 식당이 있을 거란 나의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으며 중간 딱 한 군데 있던 매점은 비싸고 퀄리티도 별로였다. (지금은 변했을지도..) 현재도 검색 해 보니 근처에는 식당이 없다고 나온다. 근처에서 숙박한다면 조식을 든든히 먹고 나오자.

4. 입장료는 국제학생증 할인이 되고, 요금은 성수기 비수기 다르다. 유럽 대부분의 여행지가 대부분 비, 성수기 가격이 다른 건 뭐 다 알겠지.. 모..

5. 춥다. 여름이라도 산속이라 서늘하고 비 온 뒤엔 더 춥다. 옷을 잘 챙겨 입고 가자.

6. 끝나고 이동 계획 시 정확한 버스 시간이 없다. 그래서 당시엔 당황한 여행자들의 항의로 갑자기 만들어진 버스 1대에 모든 여행자들이 우르르 다 탔었는데 지금도 교통상황은 그저 그런 듯하다. 관광 후 이동 예정이라면, 꼭 교통편을 확보하는 것이 안전하다.


처음부터 노숙으로 시작 한 여행이라 몸은 고단하고 고생스러웠지만,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기대 없이 간 이곳의 아름다움은 '요정들이 사는 곳'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내게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도록 만들었다. 경이로운 자연과 그것을 잘 보존할 줄 아는 멋진 사람들. 이 전 경험했던 불친절과 실랑이가 넘겨질 정도로 이 나라가 정말, 마음에 쏙 들게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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