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한 권 다 쓴 날들의 기록 : 크로아티아 폴리트비체 or 플리트비체
목적지를 말하니 새벽 2시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여행을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동안 나는 한 번도 제시간에 도착하는 버스와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었다. 2 시인 즉, 아마 아침 정도 도착할 거란 이야기. 차에서 자다가 아침부터 구경을 시작하면 되겠군 했다. 보스니아를 가는 길에 만난 한국인 남매와 함께였다.
내가 너무 마이너한 여행 코스를 택한 건지 불가리아 이후로 한국인 여행자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아, 말하지 못하는 그 답답함은 손으로 표출되어 나는 강박적으로 여행 일기를 써댔는데, 그러던 중 만나게 된 한국인이라니! 모국어로 마구 말할 수 있다는 기쁨 하나로 그들을 따라서 예정에도 없던 크로아티아, 그것도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에 가게 됐다. 막상 별 쓸 일이 없던 국제학생증 할인도 된다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이야 크로아티아는 각광받는 여행지이지만, 내가 갔을 당시만 해도 전혀 유명하지 않았고 여행자들의 카페에서나 검색될 법한 곳일 뿐 패키지 상품은 당연히 없었다. 오히려 생소한 국가명으로, 주변에 말해봐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내가 여행을 다녀온 지 몇 년 후 신문기사에 제법 큰 지면으로 할애되어 소개된 기사를 보며 왠지 모를 반가움과 서글픔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을 느끼며 기사를 읽었던 생각이 난다.
버스를 탈 때부터 짐 값을 요구하는 기사와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론니플래닛의 '하이라이트'에 소개된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이었기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룰루랄라.
버스가 출발하고 어둠이 내릴 때쯤, 동유럽 여름밤 흔히 볼 수 있는 광란의 천둥 쇼가 펼쳐졌다. 저~멀리 산 너머로 쉴 새 없이 번쩍이는 번개와 천둥소리 덕에 버스에선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배낭여행자들의 여행이 그렇듯, 우리는 고단했고 배고팠다. 잠이라도 좀 잤으면 싶었건만.
설핏, 선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버스 기사가 내리라고 말한다. 사방이 깜깜한 숲 속 한가운데 도로.
응?? 정신을 차리고 몇 번을 물으니 여기가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이니 내리라고. 일단 나, 남매 이렇게 셋이 내린다. 어둠 속, 이 시간에 같이 내리는 사람들은 없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수도인 자그레브가 목적지가 아니었을까, 가는 길에 우릴 내려준 것이고. 지금에서야 짐작해 본다.
이럴 수가.
우리가 내린 곳은 정말 산중의 깊고 깊은 숲 속 도로 한가운데, 시간은 새벽. (물론 2시는 아니었고 3시) 사방은 어둡고 저 멀리 정말 조그마한 불빛이 하나 보일 뿐, 아마 나 혼자였더라면 공포감에 패닉이 왔을 거다. 셋이어도 한 밤중 숲 속이 무서운 건 마찬가지라, 일단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걸어간다.
Post라고 쓰인 건물 앞, 유일하게 입구의 천장 등 하나가 켜져 있다. 막막하다. 그래 이 시간에 여길 구경 오는 사람이 어딨겠어.. 열린 사무실은 당연히 없을 테고. 일단 여기서 아침까지 버티기로 한다. 너무 춥다. 있는 옷을 다 꺼내어 팔에 꿰고 목에 두르고, 기념품 삼아 가지고 있던 각 지역의 지도를 다 꺼내 바닥에 깔고 눕는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몰려 오지만, 셋이라서 다행이다. 혼자였으면 제대로 공포스럽고 우울한 여행이 될 뻔했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올 리가 없는 잠을 겨우겨우 청해 본다.
새 우는 소리 몇 번을 들은 것 같았는데 저 멀리 동이 트고 주변이 밝아온다. 일어나 몰골을 수습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입구로 보이는 곳으로 향한다. 입구를 지나
자, 이제부턴 말 대신 사진으로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여행 후 토로하는 아쉬움은 '사진에 눈에 본 그대로의 색감을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이다.
살면서 평생 본 적이 없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에메랄드 빛과 코발트 빛, 그리고 투명함.
비 온 뒤의 싱그러움, 해가 뜬 후의 쨍함과 그늘의 서늘함.
다채로운 느낌에 모든 감각이 편안하게 늘어지고 이내 행복감이 느껴진다.
인위적인 것을 극도로 제한하여, 걸어 다니는 코스는 모두 자연적으로 낸 길이며, 그렇지 않은 곳은 모두 나무만을 이용하여 발 디딜곳을 만들었다.
<혹시나 여행 팁>
1. 현재는 공원 내, 근처에 숙박 시설이 많이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땐 입구의 큰 호텔 1개가 유일한 호텔이었음)
2. 소요되는 시간 별 여러 코스가 있고 그 강도도 설명되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곳을 선택하면 된다. 꼭 하루 전부를 온전히 할애하여 천천히 즐기길 강력추천!! 걷다가 배도 타고, 지상 기차? 도 타는 다양한 코스가 있다.
3. 요기할 거리는 꼭 싸가자. 몇 시간을 걷다 보면 배고프다. 어딘가에 식당이 있을 거란 나의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으며 중간 딱 한 군데 있던 매점은 비싸고 퀄리티도 별로였다. (지금은 변했을지도..) 현재도 검색 해 보니 근처에는 식당이 없다고 나온다. 근처에서 숙박한다면 조식을 든든히 먹고 나오자.
4. 입장료는 국제학생증 할인이 되고, 요금은 성수기 비수기 다르다. 유럽 대부분의 여행지가 대부분 비, 성수기 가격이 다른 건 뭐 다 알겠지.. 모..
5. 춥다. 여름이라도 산속이라 서늘하고 비 온 뒤엔 더 춥다. 옷을 잘 챙겨 입고 가자.
6. 끝나고 이동 계획 시 정확한 버스 시간이 없다. 그래서 당시엔 당황한 여행자들의 항의로 갑자기 만들어진 버스 1대에 모든 여행자들이 우르르 다 탔었는데 지금도 교통상황은 그저 그런 듯하다. 관광 후 이동 예정이라면, 꼭 교통편을 확보하는 것이 안전하다.
처음부터 노숙으로 시작 한 여행이라 몸은 고단하고 고생스러웠지만,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기대 없이 간 이곳의 아름다움은 '요정들이 사는 곳'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내게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도록 만들었다. 경이로운 자연과 그것을 잘 보존할 줄 아는 멋진 사람들. 이 전 경험했던 불친절과 실랑이가 넘겨질 정도로 이 나라가 정말, 마음에 쏙 들게 좋아졌다.